이 맛에 살지.

김신지, <제철 행복>

by 김뜻뜻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를 배경으로.



‘이게 사는 건가’와 ‘이 맛에 살지’ 사이에는 모름지기 계획과 의지가 필요한 법이다. 제철 행복이란 결국 ‘이 맛에 살지’의 순간을 늘려가는 일. 85
제철 행복은 결국 ‘이때다 싶어’하는 일들로 이루어진다. 237
사는 거 뭐 있나. 제철 음식 찾아 굳이 거기까지 가서, 굳이 줄을 서고, 마침내 고대해 온 음식 앞에서 이 계절을 기념하듯 잔을 부딪치는 그런 거지. 281


지난 5월에 제주도 독립 서점에서 특별한 책을 만났다. 초록색의 표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을 닮아있었기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제철 행복>이다. 책에는 그가 절기마다 경험한 행복과 자연에 대한 사려 깊은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매번 돌아오는 계절을 기반하는 그의 ‘제철 행복론’은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라는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책에서 나오는 24절기는 태양의 이동 경로인 ‘황도’ 360도를 15도 간격으로 나누어 계절을 세밀하게 구분한 것이다. 한 절기당 15일이며 한 달에 두 번의 절기가 있다. 기원전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 땅의 실정에 맞게 해석해 예로부터 농사와 생활의 길잡이로 삼아왔다. 우리가 흔히 여름에 들어섰다. 겨울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입하와 입동 같은 것을 절기라고 일컫는다.


신기한 것은 이 절기라는 것이 ‘해’와 ‘땅’을 기준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춘분-하지-추분-동지는 해의 사계절을 뜻하고, 입춘-입하-입추-입동은 땅의 사계절을 뜻한다. 해와 땅의 절기 사이에 두 개씩 더 들어가서 총 24절기가 된다. 작가는 한 해를 행복하게 잘 보낸다는 것은 네 번의 계절이 아니라, 스물네 번의 절기를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문장을 읽자, 그가 절기마다 행복을 느낀 제철 행동을 따라 하고 싶어졌다.


입춘에는 한 해를 세울 입춘첩을 쓰고, 우수에는 봄나물을 먹고, 소만에는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고, 망종에는 무주산골영화제에 가보고, 소서에는 비 오는 날 희우루에 서보고, 대서에는 계곡물에서 물놀이를 하고, 입추에는 구름을 세어보고, 추분에는 계수나무 냄새를 맡아보고, 한로에는 창덕궁 후원에 가보고, 상강에는 낙엽 사진을 찍어보고, 소설에는 따뜻한 술을 텀블러에 담아 걸어보고, 소한에는 나무에 맺힌 겨울눈을 찾아보고. 이렇게 제철 행복을 써보니, 마치 자연으로부터 행복을 약속받은 것 같다. 이보다 확실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중 망종의 제철 행복인 ‘무주산골영화제’에 밑줄치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덕유산 자락에서 새벽까지 야외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작가의 글에 행복이 책장 너머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영화를 예매하고 함께 갈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지인 중 급작스러운 일정에 함께할 사람은 없었다. 그때 번뜩 떠오른 것은 자주 방문했던 네이버 여행카페였다.


아무도 없을 거라 예상하며 올렸던 동행글에 뜻밖에 댓글이 달렸다. 이미 동행자가 있기에 함께 하진 못하지만, 영화제 정보를 나누는 목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무주 덕유산 집회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 맥주를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작가도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기꺼이 맥주를 사서 건넸다. 망종은 보리를 거두고, 벼를 심는 시기를 뜻하는데. 짙푸른 밤 우리들은 마음에 불안을 거두고 행복을 꼭꼭 심었다.


제철 행복과 사람을 얻는 행복까지 얻었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에 기꺼이 마음을 쏟았다는 작가처럼, 계절과 사람에 몰두하며 기꺼이 마음을 쏟았다. 낮이 가장 긴 하지를 보내고, 작은 더위 속에 장마가 찾아온다는 소서를 맞이했다. 앞으로 13개의 절기가 남았다고 생각하니 방학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처럼 달뜬다. 그렇게 행복을 누리다 보면 한 해가 지날 것이고, 자연스럽게 겨우내 품었던 겨울눈이 봄에 움트듯이 행복이 새롭게 돋아날 것이다. 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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