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P43 <물 속의 사막>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P56 <입 속의 검은 잎>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77 <빈집>
사랑을 목발질 하며 나는 살아왔구나 P114 <쥐볼놀이>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나 1989년 종로의 극장에서 스물아홉, 짧은 삶을 마감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인생을 증오하고 분노했으며 기적을 믿지 않았다. 낙관적인 미래보다 절망적인 현재와 과거를 써 내려갔다. 가난과 이별의 상처로 삶의 대부분은 불행했다. 시인의 이름은 '기형도'이다. 시인은 자신의 부조리한 기억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다.
시인의 대표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만난 것은 꽤 오래전이다. 2018년 설날, 갓 대학생이 된 사촌 동생이 하릴없는 명절날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져온 책이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기형도. 이름을 들어본 시인이지만 잘 알지 못했기에 동생에게 시가 어떤지 물어보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읽는 내내 우울해"
시간이 흘러 최근에 시집을 읽어보았다. 시에는 죽음/늙음/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즐비했다. 그때 사촌 동생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를 읽으면서 프랑스 작가 사강이 말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생각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인은 자신을 파괴하듯 실존과 죽음 사이 생각들을 시로 써 내려갔다. 죽음과 더 가까운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자신을 내몰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철학자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 크세주(Que sais-je)" 라는 말을 남겼다. 몽테뉴는 스스로를 분명하게 바라보기 위해 한 발짝 뒤에서 자신을 관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알아갔는데 시인도 몽테뉴와 비슷했다.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감정들(죽음/가난/이별)을 거리낌 없이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알아갔다. 더 나아가 시인의 시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아는가"
소확행이라는 말이 들불 번지듯 퍼져나갔던 때, 마치 행복을 능동적으로 찾지 않으면 유죄를 선고받는 느낌이었다. 불행을 행복으로 덮으며 삶을 억지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 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시인의 시가 유난히 와 닿았다. 나를 아는 것. 내가 불행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 내가 불행한 이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가려워 애꿎은 목만 긁은 적이 더러있다. 감정들이 너무나도 깊어서 때론 어떤 생각인지 까마득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기형도 시집을 읽으면 위로가 된다. 그의 위로는 생각을 그만두게 하는 다정한 손길이 아니라, 자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볼 수 있게 해주는 위로에 가깝다. 시인은 고통을 일그러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시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집을 덮을 때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가 떠올랐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라." 자신의 외로움을 받아드려라. 사람이니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해주는 시와 묘하게 닮았다. 기형도 시인이 말하는 '불안의 짐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으니 시인처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엉망인 인생을 증오해보자. 그리고 나를 알아가자. 기억과 감정들을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삶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