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

22개월 아이 육아일기

by 책뚫기

주말 오전, 아내가 아들 담박이를 보는 동안 스터디 카페를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점심을 준비하려는데 아내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믿기 어려운 말을 건넸습니다. 담박이가 “엄마, 뽀뽀”라고 말한 뒤 뽀뽀를 해주었다는 겁니다!


담박이는 태어난 지 22개월 된 저의 아들입니다. 담박이는 사람에게 무척 관심이 없는 편이라 사회성 발달이 같은 개월 수 아기들에 비해 느린 편입니다. 더불어 언어 발달도 느리고 그래서인지 제게는 담박이의 모든 발달이 느리게 느껴집니다. 며칠 전 친구와 친구 딸을 만났는데 담박이 보다 고작 한 달 먼저 태어난 친구 딸의 유려한 말솜씨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빠가 없어져서 깜짝 놀랐어.”


담박이는 겨우 아빠, 엄마, 진짜, 까까, 맘마, 밥처럼 쉬운 단어만 말하는데 친구 딸은 문장을 구사했습니다. 심지어 ‘아침에 일어났다’ ‘아빠가 없어졌다’ ‘깜짝 놀랐다’ 한 번에 문장을 세 개나 말하다니! 게다가 상황 설명, 자신이 발견한 사실, 이어진 자신의 감정까지! 저의 반응에 신나 하는 친구 딸을 보자 마치 친구 딸의 영혼과 저의 영혼이 연결되는 듯했습니다. ‘이래서 대화를 하는구나!’ 영혼이 통한다고 생각하니 친구 딸이 더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순간 제가 담박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담박이와 영혼이 통할 그날을 꿈꾸어보았습니다. 아직 담박이와 저는 사장님과 비서 사이 같다고 할까요? 저는 담박이의 필요를 잘 파악해서 제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담박이가 ‘이거 해줘~ 저거 해줘~’라는 신호를 보내면 안전한 선에서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담박이의 감정도 더 풍부해지리라, 그리고 그 풍부해진 감정을 나와 나누리라, 그런 날을 꿈꾸었습니다.




담박이는 탐험가입니다. 새롭거나 색다른 물건이나 장소를 좋아합니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익숙해져서 질릴 때까지 반복해야 직성이 풀리나 봅니다. 예를 들면, 선풍기 목을 올렸다 내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합니다. 전자레인지에 달린 모든 버튼을 몇 번이고 눌러봅니다. 전원이 꺼진 청소기로 방 이곳저곳을 문지릅니다. 하지만 익숙해져서 질리고 난 뒤에는 한동안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담박이는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높은 곳에 오르면 가려져있던 것들이 드러나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을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장 윗부분에 꽂혀있는 책들, 서랍에 숨겨져 있던 물건들, 주방 싱크대 안의 물기와 식기들, 전등 및 보일러 스위치 등등. 그동안 담박이는 자신이 탐험하고 싶은 곳이 생기면 저를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끌어당겨 주저앉히고 제 품에 올라 제가 일어서길 기다립니다. 제가 일어서지 않으면 애타게 칭얼거립니다. 그렇게 담박이는 아빠와 엄마라는 탐험선에 올라 높은 시야에서 새로운 세상을 탐험해 왔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담박이의 몸은 더 커지고 힘은 더 세졌습니다. 덕분에 담박이는 아빠와 엄마가 아닌 새로운 탐험선을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식탁용 의자입니다. 이제 담박이는 식탁용 의자를 끌고 탐험을 떠납니다. 탐험할 곳에 식탁용 의자를 정박시키고 영차영차 의자를 오릅니다. 그러면 새로운 전망이 탁 펼쳐집니다. 오늘 담박이는 주방 싱크대를 꽤 오래 탐험했습니다. 그곳에서 담박이는 오아시스 같은 비를 내려주는 수전 그리고 수영 후 몸을 말리며 쉬고 있는 그릇들과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아내가 담박이의 뽀뽀를 받았다니!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보다는 새로운 물건이나 장소를 좋아하는 담박이가 무슨! 뭐? 뽀뽀를 해주었다고? 아내가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제게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말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장난을 치는 건 아닌 듯했습니다. 그래도 뽀뽀를 해주는 담박이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를 않았기에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아내와 육아를 교대한 오후였습니다. 담박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실 창문을 열고 닫느라 땀을 뻘뻘 흘렸고, 이것저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거? 이거? 이거?”를 연신 외쳤습니다. 그러던 중 담박이가 바닥에 앉아 있던 제게 걸어와 제 무릎에 털썩 앉았습니다. 저는 저를 의자 삼아 앉아 있는 담박이를 뒤에서 포옥 안았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여자는 출산 직후 옥시토신과 프로락틴 호르몬이 분비되는 반면 남자는 아이와 스킨십을 해야만 옥시토신과 프로락틴 호르몬이 나온다고 합니다. 호르몬 때문인지 담박이를 품 안에 안으니 보들보들한 살결과 기분 좋은 체취 때문에 마음까지 보드라워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담박아. 아빠도 뽀뽀받고 싶다.”


제 말이 끝나자마자 제 품 안에 안겨 있던 담박이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았습니다. 조금은 장난기를 머금은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소를 머금은 입을 제 입에 맞추었습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마음이 붕 떴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었고 대신 저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웃고 또 웃고 계속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제 마음이 고장 나 버린 듯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만 웃으려 해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가 잠깐이나마 미친 줄 알았습니다. 대학생 때 친구들이 소시오패스가 아니냐고 놀릴 만큼 감정이 무딘 제가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다니. 제 인생에 처음 겪어보는 통제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휴우. 정말로 행복이었습니다.


담박이를 만나고 함께하며 저도 참 많이 변했나 봅니다. 옥시토신과 프로락틴 호르몬 때문일까요? 저는 변한 제가 참 좋습니다. 제게 온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어 좋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걸 알게 되어 좋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저와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에 벅차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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