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출처: 결핍

나를 둘러싼 환경, 소중함

by 책뚫기

일상 속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생각보다 제 일상 속 많은 걸 놓치고 사는 편입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듯이, 늘 사라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지금도 제 일상에는 수많은 꽃이 피어있을 텐데 이렇게 글로 쓰지 않고는 꽃이 핀 줄도 모르고 지날 거 같아, 손을 움직여 봅니다.


'소중함' 문득 저의 군생활이 떠오릅니다. 저는 남자입니다. 그래서 다들 가는 군대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라.'라는 말이 간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도 저도 아니게 억지로 군대에 갔습니다. 제게 군생활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중 하나지만, 그래도 야간 근무 후 컵라면은 잊을 수 없는 희귀한 추억 중 하나입니다.

한겨울 강원도의 밤은 추웠습니다. 내복 위에 내복을 입고, 군복 위에 군복을 입었습니다. 양말 두 겹은 필수, 군화 위에 방한용 군화를 하나 더했습니다. 목토시에 귀마개, 장갑 두 겹, 덧입을 수 있는 걸 총동원하고 나면 마치 인형탈을 쓴 거처럼 한껏 오동통해진 몸이 완성됩니다. 아참! 나가기 전에 땀이 날만큼 몸을 뜨뜻하게 데우는 건 쌘쓰입니다. 마지막으로 총을 메고 선임 또는 후임 한 명과 함께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가 야간 보초를 섭니다.

두 시간이 언제 지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하늘을 봅니다. 이야~ 은하수입니다. 별이 쏟아집니다. 내 얼굴을 차게 때리는 건 별똥별의 흔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이런 낭만적인 생각은 한 시간치 입니다. 한 시간이 지나면 생활관에서 땀까지 흘려가며 담아왔던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손과 발이 먼저 시려옵니다. 빙글빙글 제자리를 돕니다. 발을 동동 구릅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에이씨. 이건 아니잖아." 낭만적이던 로맨스가 가혹한 스릴러가 됩니다. 함께 대화하던 선임이나 후임도 말을 잃습니다. 이제 자신과의 전쟁입니다.

어찌어찌 두 시간이 지납니다. 그런데 가끔 교대할 인원들이 오지 않습니다. 늦잠을 자는지, 총기에 문제가 있는지, 아픈지, 온갖 이유를 상상하며 남은 시간을 짐작합니다. 걱정은 이내 저주가 됩니다. '차라리 아플 거면 뒤지게 아파라.', '보초 근무를 빠져서 징계를 먹어라.', '다음 근무 때 내가 뒷 순서면 더 크게 복수할 거야!'.

어기적어기적 교대 인원들이 걸어옵니다. 실실 웃으며 미안하다는 성의 없는 사과를 건넵니다. 방금 전까지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지만, 어색한 웃음으로 그를 배려합니다. 선임이니까요. 그게 군대의 법입니다.

여하튼 해방의 시간입니다. 취침시간 두 시간이 훌쩍 사라졌지만, 이대로 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보상받아 마땅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선임 또는 후임 한 명과 함께 미리 사두었던 컵라면을 꺼냅니다. 다른 인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기에 조심조심 컵라면을 꺼내 세탁실로 향합니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정해진 양보다 조금 더 받습니다. 그 위에 취향에 따라 참치캔이나 햄을 추가합니다. 기름기가 둥둥 뜬 고칼로리 컵라면이 익어갑니다.

그제야 얼었던 표정이 풀어집니다. 잔뜩 기대하며 첫 면을 들이켭니다. 후루루루룩! 면을 제대로 씹기도 전에 국물도 들이켭니다. 호로로로록! 묵직하고 짭짤하고 뜨뜻한 온기가 식도를 타고 배로 향하는 게 느껴집니다. 하아~ 이제야 살 거 같습니다. 두 시간의 혹한을 이겨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함께 근무를 선 동료와 눈이 마주칩니다. 우리는 어이없는 거대한 행복을 공감하며 피식 웃습니다. 그리고는 컵라면 용기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자기 만의 세계로 떠납니다.


군대에서 만난 목사 장교님의 말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행복은 결핍에서 옵니다.


곱씹어보니 목사님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찰하셨던 듯합니다. 저는 컵라면 하나에도 행복할 수 있었지만 이내 그 소중함을 잊어버렸습니다. 저는 충족된 것, 흔한 것에 '소중함'이란 딱지를 떼어버렸습니다. 없을 때는 그리도 열망했었는데...... 결국 뺏기거나 사라지고 나서야 '소중함'이란 딱지를 서둘러 주워보지만, 이미 붙일 곳은 사라진 뒤입니다.





일상 속 나를 둘러싼 소중한 환경. 저를 둘러싼 환경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싶어 먼저 '환경'을 구성하는 것부터 찾아보았습니다.


시간, 공간, 사람, 사물, 사건, 제도


내가 누리는 시간, 내가 누리는 공간, 내가 누리는 사람, 내가 누리는 사물, 내가 누리는 사건, 내가 누리는 제도.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곧 사라질 일상을 발견했습니다. '퇴근 후 아내와 함께하는 산책'입니다. 직장 일을 마치고 휴식을 누리는 시간, 자동차 걱정 없이 걸을 수 있는 잘 포장된 산책길, 나의 모든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아내, 산책길에 만나는 다양한 식물과 동물들, 아내와 대화할 거리가 되는 직장 내 다양한 사건들, 늦은 밤에도 산책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치안까지. 모든 걸 합해야 가능한 소중한 산책입니다.

다만 이제 곧 둘만의 산책은 당분간 사라질 듯합니다. 아내가 만삭이기 때문입니다. 담박이(태명)의 탄생이 머지않았습니다. 최근 들어 아내의 걸음 속도도 느려지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 누리는 산책은 이제 곧 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아내와 단 둘만의 시간이 무척 소중해지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언젠가 담박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셋이서 산책할 수 있겠죠? 그리고 더 먼 훗날, 아내와 단 둘이 산책할 날이 오겠죠?


고마워 산책길아~


모든 게 변해갑니다. 어쩌면 아쉽게도 지금 뿐인지 모릅니다. 오늘은 지금 이 '소중함'을 깊이 누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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