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유전자 오작동

내 내면의 목소리 찾기

by 책뚫기

삼십 년이 조금 넘는 인생을 살며 한 번이라도 궁금해한 적이 있던가? 글쎄… 나는 한 번도 궁금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아닌가?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혹시나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에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마치 ‘나는 사람이다’와 같은 참인 명제이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당연해서 의문을 품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생각이다.




사람은 왜 감정을 느낄까?




내게 감정은 피곤한 것이다. ‘감정’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곧장 ‘노동’이 따라붙는다. 머리가 아득해지고 힘들어서 잠깐 숨이 멈췄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마 나의 직업이 교사이기 때문인 듯하다.


교사인 나에게 감정이란 참 무거운 단어다. 하루에 스무 명이 넘는 아이의 감정과 그 뒤에 계신 보호자 분들의 감정을 신경 쓴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조절할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교사의 사명이지만, 헷갈린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이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는 내 모습 때문이다. 교사의 사명에 집중하면 할수록 보호자님들의 민원과 가까워지는 듯하다. 왜 우리 아이만 미워해요. 우리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망쳤어요. 우리 아이 힘들게 좀 하지 마세요. 민원을 받고 난 교사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축 처지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교사의 사명을 다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나도 친구 관계를 어려워하는 6학년 아이 K의 감정을 특히 더 돌보아주려고 애썼던 적이 있다. 나는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소외되는 아이들에게 자꾸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 그 해에는 K였다. 나는 때로는 K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어주는 부모가 되었다가, 때로는 K의 말과 행동이 친구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일러주는 상담사가 되었다가, 때로는 낄낄대며 장난치고 놀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하루는 K가 친구와 주먹다짐까지 해가며 대판 싸웠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친구의 멱살을 온 힘을 다해 부여잡는 K를 나는 힘으로 뜯어말렸다. 상대 아이는 금방 진정이 되었지만 K는 말리는 나를 보며 “제가 우스워요?!”라며 분노의 방향을 바꾸었다. 펑펑 우는 K의 눈물을 닦아주며 몇 시간을 위로해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K는 정신과 상담이 필요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때 알았더라도 보호자님에게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는 말은 못 했을 거다.


방과 후에 교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잠깐 내려오라는 건조한 말이었다. 교장실에 들어가니 옆에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한쪽에는 K와 K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K의 맞은편에 앉았다. K는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척 화가 났는지 분노에 가득 찬 눈빛, 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그 눈빛의 방향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을까? 힘든 친구 관계 속에 분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왜 나일까? 나는 아이와의 추억을 돌려보고 돌려보았지만 그럴수록 의구심만 짙어졌다.


K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들은 나를 평행우주의 다른 세계로 여행하게 했다. K는 친구 관계가 망했고, 그 모든 것은 담임 선생님인 나 때문이라 말했다. K의 기억 속에는 한 맺힌 이야기를 들어주던 부모 같았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생각하기에 상담사였던 나는 K의 잘못을 지적하는 적군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친구였던 나는 K를 조롱하고 비웃는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여기는 어딘가? 내가 존재했던 세상이 맞나? 내 앞에 앉아 있는 아이가 평행우주의 다른 세계에서 온 걸까? 아니면 교장실 문을 통해 내가 평행우주의 다른 세계로 온 걸까? 내게 다가와 자기 말을 토해내고, 쉬는 시간마다 내게 보드게임을 들고 와 같이 하자던 K는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는 나의 말을 듣고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선생님에게도 잘못이 있다며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K에게 사과했다. 선생님은 네가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때 참 속상했어. 그래서 너를 돕고 싶었어. 선생님은 네가 친구들과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너의 이야기를 듣고, 때로는 조언하고, 때로는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니 정말 미안하다. 선생님이 더 공부하고 고민해서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지혜롭게 도왔어야 했는데, 부족해서 참 미안하다. 너의 마음속에 큰 상처를 남겨서 정말 미안하고, 선생님의 사과로 너의 마음속 상처가 조금이나마 나아지면 좋겠다.


그 뒤로 고민이 많았다. K에게 이 상황을 탓할 사람이 필요했을까? 아니면 정말로 나의 말과 행동이 K에게 상처로 기억됐을까? K의 미소는 모두 거짓된 가면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나의 사명감이 이 상황의 원인이라는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K와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나의 눈빛마저 K에게 상처가 될 거 같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감정을 마주할 때도 멈칫 멈칫하게 되었다. 특히 다투고 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수십 초를 고민했다. 조금도 오해될 소지가 없도록, 정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료 교사와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선생님’이란 평가를 받는 교사들은 큰 민원에 한두 번씩 휘말렸다. 그때마다 그들의 축 처진 어깨, 그보다 더한 좌절을 보았다. 교사는 부정적인 감정의 종착지였고, 교사 자신의 감정도 속절없이 그 종착지에 넘겨주어야 했다. 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교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교사의 법적 명칭 ‘교육 공무원’이라 생각하였다. 공무원, 시민의 삶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그리고 그 공공 서비스는 법과 제도가 허락하는 테두리 안에서 제공한다. 법과 제도가 말하는 만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정해진 대로, 시키는 대로. 나를 지우고,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만 남겼다.


교장실에서 헤어지기 전, 나는 K의 아버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당장 내일부터 K가 행복하고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어려울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K가 학교에서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저 또한 K에게 상처 주지 않겠고, 혹여나 친구들이 K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잘 살피겠습니다.


다음날 K는 어설픈 표정과 몸짓으로 등교했다. 나는 K에게 인사를 건넸고, K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날부터 K는 혼자되기를 선택했다. 나는 K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고, K는 내 주변을 서성일뿐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친구들은 K에게 관심이 없었고, K도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고, K는 졸업을 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K의 졸업을 축하하지 못했다. K도 나의 축하에 시큰둥한 채 학교를 떠났다. 나는 교육 공무원이었고, K는 수많은 졸업생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나는 K가 학교에서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K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사람은 왜 감정을 느낄까?




한 번도 질문해보지 않았다. 그러게, 사람은 왜 감정을 느낄까? 감정은 왜 존재하는 걸까? 차라리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육이 얼마나 쉬울까? 감정은 왜 꼭 타인에게 흘러야 하는 걸까?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면 안 되는 걸까?



다른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신체와 뇌는 살아남아서 유전자를 후세에 퍼뜨리라는 단 하나의 기본 원리에 기반을 두고 진화해왔다. 진화는 일련의 다양한 전략을 시도해왔다. 그중 하나가 어떤 종에게는 적으로부터 재빨리 달아날 수 있도록 민첩성을 주거나 발각되지 않도록 위장 능력을 주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략은 긴 목 덕분에 다른 동물이 먹을 수 없는 잎사귀를 먹을 수 있었던 기린처럼 다른 종이 따라 할 수 없는 남다른 특질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전략은 (인간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해당 종이 생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감정은 기본적으로, 기린의 목이나 북극곰의 털 색깔과 다를 게 없는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속성이라기보다는 좀 더 유연하고 빠르게,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출처: 안데르스 한센, 인스타 브레인, 김아영 옮김, (동양북스, 2020), 37



감정이 생존 전략이라니,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한 설명이다. 내가 생각하는 감정이라는 건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해서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는데, 잘 훈련된 안내원이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듯하다. 뭐 그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으셨어요.


음식을 보면 배고픔을 느끼게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독이 있는 음식이나 벌레를 보면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맹수를 보면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여 심박수를 올린다. 이성을 보면 흥분감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곳이나 나무 위를 보면 기대감을 느끼게 한다. 무리를 지으면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감정이 생존 전략이라니, 생존하기 위해 감정을 느낀다니. 그럼 K의 격한 감정도 생존 전략이었을까? 격한 만큼 살려달라는 메시지였을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답답해요! 화나요! 벗어나고 싶어요! 불안해요! 살려주세요! 였을까? 분노에 가득 찼던 K의 눈빛, 나를 향해 이해할 수 없었던 K의 눈빛은 사실 구원 신호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K는 교장실 이후 더는 구원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어설프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남은 6학년 생활을 보냈다는 뜻이니까. 그날 이후 K는 더는 슬프지도 않았지만 더는 기쁘지도 않았으니까. 감정을 잃어버린 K, 생존 전략을 잃어버린 K, 자기 일부의 생존을 포기한 K.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저조한 기분 탓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데, 최근 이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스웨덴에서는 성인 10명 중 8명(!)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가 전례 없이 부유해지고 GDP가 상승한 지난 수십 년 동안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사람 수도 동반 상승했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여건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은 점점 나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출처: 안데르스 한센, 인스타 브레인, 김아영 옮김, (동양북스, 2020), 9



초등 교사 생활도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슬프게도 K처럼 마음에 상처가 곪아가는 아이들은 점점 늘어난다. 나는 아이 문제의 대부분은 보호자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K와 같은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 뒤에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지친 어른들이 많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K의 아버지, K의 어머니도 그랬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성인 10명 중 8명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는데, 스웨덴의 초등학교는 지금 괜찮을까?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도대체 세상은 왜 나를 비관론자로 만드는 걸까? 왜 세상은 내게 교사 생활을 유지하려면 선생님보다는 공무원이 되라고 말하는가?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점점 좋아지는데도 왜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걸까? 지금처럼 많은 사람과 서로 연결되어 있던 적이 없는데도 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외롭다고 느끼는 걸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질문들에 근본적인 원인이 뭔지를 파헤치고 싶었다. 한 가지 답변을 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지금 우리 스스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낯설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우리가 지금까지 진화해온 세상 간의 ‘불일치’가 우리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안데르스 한센, 인스타 브레인, 김아영 옮김, (동양북스, 2020), 10



인스타 브레인의 저자는 말한다. 점점 불안한 사람이 늘어나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진화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인간 유전자는 수렵 채집에 적합하게 진화된 상태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복잡하고 빠른 디지털 세상이다. 그리고 인간 유전자는 아직 디지털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회가 있을 때 칼로리를 몽땅 축적하는 유전자가 과거에는 생존에 유리했지만 그 유전자가 현재는 비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역행자⌟의 저자 자청 님은 이런 현상을 유전자 오작동이라 표현한다. 칼로리를 축적하지 않아도 되는데 칼로리를 축적하고 싶어 하는 오작동. 원시 부족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건 곧 죽음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요즘 세상에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는 오작동. 어두운 곳에서 큰 생물을 보면 일단 도망치는 게 생존에 유리했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일부만 보고 재빨리 판단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는 오작동.


K의 불행도 유전자 오작동 때문일까? 유전자 오작동을 극복하게끔 도와줬더라면 나는 공무원이 아닌 스승으로, K는 졸업생이 아닌 제자로, 졸업을 축하하고 축하받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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