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될 준비
한 달 반 뒤, 11월 중순이면 나는 아빠가 된다. 약 일 년 남짓 시도 끝에, 담박질(달리기)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담박이(태명)가 찾아왔다.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 담박이가 찾아온 지도 벌써 여덟 달이 훌쩍 지났다. 임신 테스트기의 빨간 줄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던 담박이의 존재, 하지만 어느덧 제법 부푼 아내의 배를 보자 담박이가 현실로 다가온다. 아내의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면 담박이는 생각지도 못한 옹골찬 힘으로 내 손을 밀어내곤 하는데, 덩달아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동시에 약간의 소름이 돋고 머지않아 경외감에 잠시 넋을 놓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의 부모님과 비교하자니 나는 아직도 마냥 어린애 같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고, 인내하고, 위로하고, 응원했던 모든 순간들 속 나는 어린애였다. 심지어 성인이 된 후 결혼하는 날에도, 담박이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던 날에도 부모님은 나를 축하하고 응원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하며 단 한 번도 어른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마냥 어린애인 내가 담박이의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담박이의 아빠는 고사하고, 어른이 되긴 한 걸까? 어린애가 애를 돌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 담박이의 삶이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아닐까? 이어지던 걱정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나도 이제 조금은 어른이 된 듯한 순간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였다. 칭찬받으려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칭찬받으려고 공부하고, 칭찬받으려고 포기하지 않고, 칭찬받으려고 남과 다르게 했다. 동시에 장난꾸러기여서 혼도 많이 났는데, 혼날 때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누군가를 탓해서 나의 잘못을 없애려 노력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유치원 때 친구 두 명과 교실에서 뛴 적이 있다. 하원 할 시간이어서 가방을 챙겨 줄을 설 때였는데, 우리 셋은 가방도 챙기지 않고 유치원 교실을 뛰어다녔다. 우리를 발견한 원장 선생님은 우리 세 명에게 손을 들고 서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손을 든 채로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나를 뛰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분명 신나게 같이 뛰었지만, 내가 혼나는 건 다 친구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원망이 그득 담긴 눈으로 두 친구를 노려보았다. 나는 차마 말은 못 하고 씩씩거리며 울었고, 친구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당황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원장 선생님은 그런 나를 이유도 묻지 않고 따뜻하게 안아주셨기에 나는 그 억울함을 달랠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생, 중학생 심지어 고등학생 때도 누군가 칭찬받는 모습을 보면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나도 칭찬받고 싶은데'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웠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늘 크고 작은 질투를 품었고, 칭찬받기 위해 늘 노력했다. 물론 녹록지 않은 가정환경, 나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을 보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강박도 한몫했다.
최근 한 직장 동료가 고생 끝에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해냈다. 쉽지 않은 꿈이었고, 그가 공들인 시간과 노력이 적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이 그를 축하하고 칭찬했다. 다들 그의 성취에 놀랐고, 포기하지 않은 그의 인내를 위로했다.
하지만 내게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꿈을 이룬 그가 칭찬받는 모습을 보고도 질투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일이다. 심지어 '얼마나 고생했을까', '정말 잘 됐다', '이제는 그가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내 마음속에는 늘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뒤처지기 싫은 어린아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치열하게 살아야 마음이 편안했고, 그 치열한 삶의 대가로 칭찬을 받아야만 후련했다. 이제야, 그 어린아이의 한이 풀렸나 보다. 이제는 칭찬받지 않아도 괜찮고, 타인의 인정보다는 스스로의 인정을 기준 삼아 선택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뒤처지기 싫은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무척 좋다.
이제는 담박이의 아빠가 될 준비가 된 듯하다. 적어도 이제는 내 마음속 어린아이를 돌볼 수준이 됐으니 말이다. 아빠는 처음이니 어리숙하고 실수도 많을 테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린아이의 한을 풀어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알아차렸기에, 내 마음속 어린아이의 한을 푸는 데 30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그리고 내 마음속 어린아이를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기에, 나는 담박이의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