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 내면의 목소리, 소외

내 내면의 목소리 찾기

by 책뚫기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소외다.


소외된 사람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무시하기도 하고, 어떤 사연이 있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때로는 목소리를 내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도 하고, 거칠게 목소리를 내어서 오히려 깎여나가기도 한다. 결국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소외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외롭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자기 목소리가 소외되지 않게 하려는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다. 8시 30분이 되면 아이들이 하나 둘 등교하기 시작하여 8시 50분이 되면 몇 분 전의 고요는 흔적을 감춘다. 아이들은 단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사람은 많고 그 꽃을 감상하려는 사람은 귀하다. 그래서 교사는 귀하다. 아이들은 자기 꽃을 피우려고 경쟁적으로 교사에게 달려든다. 한 아이가 이야기꽃을 피울 때 다른 아이들은 눈치 싸움을 한다. 짧은 몇 분 동안 수많은 꽃이 피고 진다. 시간이 부족하여 한 번도 자기 꽃을 피우지 못한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이 된다.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쟤는 두 번 발표했는데 저는 왜 한 번 밖에 안 시켜줘요? 선생님은 왜 여자애들만 시켜줘요? 남녀차별해요? 선생님은 왜 이 쪽 줄에 앉은 애들만 시켜줘요? 자리 차별해요? 선생님은 왜 키가 작은 애들만 시켜줘요? 키 차별해요? 선생님은 왜 안경 쓴 애들만 시켜줘요? 시력 차별해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기가 막힌 이유들을 찾아낸다. 아이들은 자기 목소리가 소외되는 걸 참지 않는다.


그러나 소외는 아이의 의지와 상관 없이 찾아온다. 쟤는 자기 주장만 해서 같이 놀기 싫어요! 저한테는 하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자기는 해요! 저도 하고 싶은데 쟤만 해요! 제 물건 만지지 말라고 하는데 말을 해도 안 들어요. 아이들은 제 멋대로 자기 목소리를 내다가 싸우고 다투고 울고 화내고 짜증낸다. 그러면서 배운다. 친구에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교사 생활을 하면서 접하는 가장 마음 아픈 소외는 가정 환경에서 비롯된 아이의 소외다. 부모님의 싸움, 부모님의 이혼, 교통사고로 인한 아버지와 이별, 법적 분쟁에 휘말려 도망다니는 부모, 특별한 사연을 품은 가정의 아이는 자기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한다. 아이는 소외된 자신의 목소리를 감춘다. 부모님이 더 싸울까봐, 부모님이 이혼하듯 자기랑도 이별할까봐, 엄마마저 사고로 사라질까봐, 깡패가 집에 찾아올까봐, 자기 목소리를 죽인다.


교사 생활을 하며 가장 무력할 때가 이때다. 아이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가정 사정이야 어찌됐든 학교에서 만큼은 아이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성장하면 좋겠는데, 아이에게는 그게 쉽지 않다. 아이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든지, 엉뚱한 방법으로 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침묵으로, 아니면 절규로.


나는 그 소외에 대해 말하고 싶은걸까? 아이가 내지 못하는 그 목소리를 마음으로 들어주고 싶은 걸까? 이건 내 내면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이 것도 정답 맞히기 식 삶의 흔적일까?




H. 그 당시 H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H에게는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말을 전하는 버릇’이었다. 야, 쟤가 너 못생겼다고 했어. 쟤가 너 짜증난데. 진짜야! 내가 들었어. 처음 몇 번은 H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H는 외톨이가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H를 일부러 무시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다만 H가 불편했을 뿐이다. H는 더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아니 전할 친구가 없었던 거였다.


H는 다른 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H는 다른 반 친구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H에게는 다시 친구가 생겼다. H의 버릇은 잠시 쉬고 있었을 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친구가 생기자 H의 버릇이 다시 깨어났다. 우리반 Y가 네 언니 뒷담 깠어. 네 언니 못생겼다고 했어. Y는 6학년 선배들의 전화 폭탄을 받았고, 다음날 Y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H는 1년 전에 Y가 그 말을 했었다고 내게 말했다. Y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먼 과거의 일이었다. 1년 전에 있던 오래된 일을 굳이 왜 전했냐는 나의 질문에 H는 선배들이 물어봐서 어쩔 수 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6학년 아이들과 다른 반 아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다시 H에게 물었다. 그러나 H를 거짓말을 한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기억이 헷갈릴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언니들은 네게 물어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언니들 말과 너의 말이 달라서 헷갈려서 그러는데 혹시 기억 나는 게 있을까?


H는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면…… 제가 먼저 말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구나. 그런데 요즘 Y랑 놀지도 않고 말 하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 1년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한 이유가 있을까?


…… Y랑 친했을 때 상처받은 게 있는데 싫어하는 마음이 올라와서 그랬어요.


그랬구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너의 말을 듣고 나니 선생님은 네가 조금 걱정되는데?


H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 눈을 봤다.


혹시 요즘 힘들거나 짜증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 있어? 네가 요즘 행복하고 즐겁다면 굳이 요즘 말도 안 하는 Y 생각이 안 났을 거 같아서. 혹시 요즘 힘들거나 짜증나서 예전에 Y에게 상처받은 기억이 떠오른 게 아닌가 싶어서.


H는 마주치던 두 눈을 다시 아래로 내리고 표정을 지웠다. H의 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혹시 요즘 힘들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니?


H는 고개를 어찌할 줄 모르더니 H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무나 큰 물방울이 그렇게나 빨리, 후두둑 떨어졌다. H가 미처 감출 새도 없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H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H가 내일 Y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했으니 어머니께서도 H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니, 선생님! 사실을 전하는 게 뭐가 문제가 되죠?!


툭. 세상이 30도쯤 기울었다.


아이가 있었던 일을 전하는 게 뭐가 문제가 되냐는 거였다. 왜 우리 아이가 Y에게 사과를 해야 하냐는 거였다. 선생님, Y 걔가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니는 지 아세요? 우리 애가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평소 나쁜 말을 하고 다니는 Y가 잘못이지 왜 우리 애가 사과를 해야 하나요?


투둑. 세상이 60도쯤 기울었다.


어휴. 이래서 주택 사는 애들이랑은 가까이 하면 안 된다니까.


뚝.


뚝.


뚝.


눈물이 떨어졌다. 주택 사는 애들. 주택 사는. 주택? 건축 폐자재가 쌓인 창고에 가벽을 세워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 그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H의 엄마가 나의 과거를 알면 뭐라고 할까? 선생님이 그 수준이니 사리분별을 제대로 못하시는 거 아니에요?!


세상이 360도쯤 기울었다. 전화를 걸었던 나는 어느새 어린 아이였고, H 엄마의 말은 Y가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눈물만 떨어뜨렸다. H 엄마의 말은 칼이 되어 한번도 원망한 적 없던 어린 아이의 처지를 무참히 찢었다. 흐읍. 어린 아이는 숨을 참았다. 감정을 질식시킬 생각이었다. 눈물이 멎고 감정이 죽었을 때쯤. 후우. 다시 숨을 쉬었다.


세상이 다시 0도쯤 기울었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H가 생각났다. H는 괜찮을까? H는 소외되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엄마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H의 숨겨진 목소리를 들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소외된 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일에 나는 영 젬병이다. 나 또한 소외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소외된 자는 눈물을 흘릴 뿐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데 재능이 있나보다.






나 또한 완벽주의를 강요하는 사회에 길들여져 있던 탓일까. 누가 뭐래도 흠결 없는 나무 의사가 되고 싶었다. 나무를 하나라도 더 살리려고 애썼고, 살리지 못하면 속이 상했다. 의사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유독 살리지 못한 나무들만 내내 마음에 남았다. 목전에서 죽어가는 나무들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다. 전부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인 것만 같았고, 그럴수록 나무 의사 노릇을 하는 것 자체에 회의가 들었다.

출처: 우종영,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메이븐, 2019), 47


나 또한 완벽주의를 강요하는 사회에 길들여져 있던 탓일까. 누가 뭐래도 흠결 없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아이의 목소리를 하나라도 더 살리려고 애썼고, 살리지 못하면 속이 상했다. 교사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유독 살리지 못한 아이들의 목소리만 내내 마음에 남았다. 목전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다. 전부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인 것만 같았고, 그럴수록 교사 노릇을 하는 것 자체에 회의가 들었다.


나는 우종영 작가님의 글에 깊이 감정이입했다. 과거 그의 고민은 지금 나의 고민이었다. 분명 나는 능력있는 교사, 잘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 평가의 기준은 목소리를 살려낸 아이의 수였다. 소외된 아이를 위해서도 있었겠지만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나를 위해서도 분명 있었다. 아이를 위한 길이었을까? 나를 위한 길이었을까? 나는 우종영 작가님 삶의 흔적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서둘러 다음 구절을 읽었다.


원래 반송은 생태적인 특성상 다른 소나무에 비해 수명이 짧다. 줄기에 비해 가지를 너무 많이 뻗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뻗어 나간 가지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가지들이 갈라져 결국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줄당김으로 가지끼리 잘 묶어 주면 줄기가 갈라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반송을 오랫동안 돌봐 온 절에서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나무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그냥 놔둔 걸까? 안타까운 마음에 이미 갈라진 줄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곁에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젋은 스님이 연락을 드린 모양인데 그냥 두시지요. 살 운명이면 그냥 둬도 살 것이고, 죽을 운명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죽지 않겠소.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려는 나무를 억지로 살려 내는 것도 순리는 아니지요.”

출처: 우종영,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메이븐, 2019), 47-48


“우리 아이가 연락을 드린 모양인데 그냥 두시지요. 살 운명이면 그냥 둬도 살 것이고, 죽을 운명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죽지 않겠소. 죽어서 소외로 돌아가려는 아이의 목소리를 억지로 살려 내는 것도 순리는 아니지요.”


아니다. 노스님의 말에는 도저히 감정이입할 수가 없다. 아이와 나무는 다르다. 아이의 목소리가 소외로 돌아가는 건 순리가 아니다. 억지로라도 살려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라도 소외된 아이의 목소리를 살려낸 적이 있던가? 가정 환경이란 벽에 막혔을 때 소외된 아이의 목소리를 살려낸 적이 있던가?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이 있던가?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이 있던가? 가정 환경이란 벽은 순리인가? 그 것을 역행하려는 건 욕심인가?


좋다. 가정 환경의 벽이 순리라고 치자. 억지로라도 인정하고 다시 감정이입해보자. 읽던 글을 마저 읽었다.


그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살려 보겠다는 염원이 실은 나무 의사로서 완벽해지고 싶은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고,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그래서 최고라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과해 나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나무 입장에서 판단하고 자연의 순리에 맞게 나무 의사 노릇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내 과욕이 주어진 삶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거스른 걸까.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출처: 우종영,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메이븐, 2019), 47-48


그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한 아이의 목소리라도 더 살려 보겠다는 염원이 실은 교사로서 완벽해지고 싶은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고, 일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그래서 최고라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과해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판단하고 가정 환경에 맞게 교사 노릇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내 과욕이 주어진 삶을 살다가 가정 환경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거스른 걸까.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흐읍. 어린 아이는 숨을 들이 마셨다. 어린 아이는 감정을 되살릴 생각이었다. 인공호흡하듯 숨을 불어넣었다. 후우. 우종영 작가님의 글이 부드러운 공기가 되었다. 흐읍. 어린 아이는 부드러운 공기를 들이 마셨다. 인공호흡하듯 숨을 다시 불어넣었다. 후우. 툭. 투둑. 뚝. 뚝. 뚝. 다시 눈물이 흘렀다. 따뜻함, 그리고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아이 입장에서 판단하고 가정 환경에 맞게 교사 노릇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판단하고 가정 환경에 맞게 교사 노릇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판단하고 가정 환경에 맞게 교사 노릇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정 환경을 탓하고 싶다. 세상의 풍파가 휩쓸고 간 가정 환경이 너무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도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있다. 두 개나 있다. 우리 아이가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소아정신과 진료를 받으려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진료를 받을텐데, 한 달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진료를 받게 하는 보호자들의 수만 그렇다. 초등학교에는 진료가 필요하지만 받지 않는 아이의 수가 더 많다. 비싸기도 하고, 시간을 내기는 더욱 어렵고, 마음을 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나는 가정 환경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 그건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가정 환경을 탓했던 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최고라고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더불어 내 마음 속 어린 아이의 소외된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한 때 재즈를 듣던 때가 있었다. 재즈를 듣다보면 그 아름다움에 소름이 끼칠 때가 종종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감탄의 탄식!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테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소외되지 않는 조화다.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드럼은 드럼대로, 색소폰은 색소폰대로, 베이스는 베이스대로 자기 색깔을 뽐낸다. 그 색깔이 저마다 멋지다. 그런데 신기한 건 함께 있어도 멋지다는 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같이 있는데, 각자 자기 색깔을 뽐내는데, 자기 목소리를 내며 같이 있는데, 안 싸울 수가 있는거지? 심지어 멋있잖아! 피아노도 살고, 드럼도 살고, 색소폰도 살고, 베이스도 살고, 그리고 넷이서도 같이 산다.


나는 재즈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나도 살고 아이도 살고 둘이서도 같이 살고 싶다. 나도 살고 아이도 살고 보호자도 살고 셋이서도 같이 살고 싶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같이도 살고 싶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누구 하나 죽지 않고, 같이 살고 싶다.


소외되지 않는 조화, 내가 찾은 첫 번째 내 내면의 목소리다. 교사로서는 아이 입장에서 판단하고 가정 환경에 맞게 교사 노릇을 하고 싶다. 사람으로서는 소외된 목소리를 듣고 글로 전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소외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오랜만에 예전에 들었던 재즈를 다시 들어본다.


https://youtu.be/o3Kl2nBNV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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