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오랜만에 아내와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았다. 시작은 김장이었다. 아내 집안과 달리 우리 집안은 유교 사상이 뿌리 깊다. 유교와 김장은 별 상관이 없는 듯하지만 내게는 김장도 명절과 시제만큼이나 유교 냄새가 난다. 나는 우리 집안의 유교 사상이 나의 아내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기에 명절이나 시제 때만큼이나 김장철에도 더듬이를 바짝 세운다. 게다가 최근 시집살이를 주제로 한 『며느라기』라는 만화책을 보고 있던 터라 내 더듬이에는 바짝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
나는 내 아내가 참 고맙다. “이 정도는 괜찮아.” 할아버지 생신, 할머니 생신, 설, 추석 때마다 아내는 가족 행사 자리에 함께 가준다. 김장 때도 그렇다. “우리가 먹을 김치인데 나도 같이 갈게.” 힘든 일인데도 아내는 선뜻 마음을 내준다. 나와 아내는 늘 이런 식이었다. 유교가 다가올 때마다 나는 더듬이를 세워 아내의 표정을 살피고, 아내는 선뜻 마음을 내어주고, 나는 늘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담박이가 생긴 거다. 아내가 13개월 담박이를 돌보는 동안 나는 혼자 김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야 김치를 양념에 버무리는 일 뿐이니 오전, 반나절만 자리를 비우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내도 동의했다. 그러면 될 일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말을 바꾸었다. 김장은 돕지 못하더라도 점심 먹을 때쯤 늦게라도 할아버지 댁에 오겠다는 거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담박이를 보고 싶어 하실 거라는 게 이유였다. 자기도 집에서 육아만 하기보다 나들이 느낌으로 나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또 담박이도 13개월이니 다양한 사람을 자주 만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덧덧붙였다.
‘역시 천사야’ 아내는 날개 잃은 천사가 분명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잘못된 선택을 했겠지만, 결혼 하나만큼은 로또급으로 잘한 게 분명하다. 이런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니! 게 아무리 뿌리 깊은 유교라고 하지만, 올해 김장 철도 나와 아내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할 듯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유교도 빈틈 하나 찾지 못한 나와 아내 사이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눈이었다. 김장 하루 전 토요일 아침,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거실 창 밖으로 설산과 그 아래 눈밭을 기어가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나는 담박이를 품에 안고 그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담박아 밖에 눈 온다! 눈이 쏟아지네~ 우와~ 멋지다. 담박아 어때? 멋지지?” 나와 같이 경치를 즐기던 아내가 문득 말을 뱉었다.
“내일 갈 수 있을까?”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면 나 혼자만 가야지. 위험해 오지 마”
“그렇겠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때 아내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아쉬움을 전혀 읽지 못했다.
낮이 되니 거짓말처럼 눈이 멈추고 햇빛이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다. 겨울왕국이 된 아파트 풍경은 여전했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큰길의 눈은 대게 녹아 없어졌다. 날씨가 참 도깨비 같았다. 도깨비 같은 날씨 때문에 아내의 마음도 도깨비처럼 갈팡질팡했다.
“이 정도면 갈 수 있지 않을까?”
“큰길의 눈은 모두 녹았으니 천천히 오면 올 수는 있을 거 같은데? 그런데 골목 같은 데는 여전히 위험할 거 같고.”
나는 아내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일 오전에 길 상태가 괜찮으면 갈 수 있는 거고, 길 상태가 괜찮지 않으면 안 가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내일 아침 내가 할아버지 댁 가면서 길 상태 보고 연락 줄게. 지금 고민해봤자 어차피 답을 내릴 수가 없으니까”
아내는 진지하고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알겠다는 아내의 말만 들렸다.
아내와 나는 매일 저녁 산책을 즐긴다. 요새 같이 추운 날에도 산책을 포기하지 않는다. 산책은 아내에게 하루 중 유일한 외출 시간이자 대화 시간이다. 우리는 패딩, 모자, 목토시, 장갑으로 무장한다. 담박이에게도 패딩과 모자를 입힌다. 그리고 담박이가 타는 유아차에는 핫팩을 넣고 방한 커버를 씌운다.
토요일 저녁, 눈이 그치고 인도에 쌓인 눈도 많지 않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산책을 나섰다. 산책을 나서며 길 상태가 눈에 들어오자 아내는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정도면 내일 갈 수 있지 않을까? 가는 건 괜찮은데 도착해서 주차장 쪽에는 눈이 많이 쌓였을까?”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차피 지금은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일 내가 먼저 할아버지 댁에 가서 상태를 보고 연락하겠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혼자 하는 넋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내게 물었다.
“듣고 있어? 어떻게 생각해?”
“그걸 왜 지금 걱정해? 지금 걱정해도 해결이 안 되는데. 강호동이 그러더라, 걱정 대출은 하는 게 아니라고.”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아도 참 나다운 답이었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는 마땅한 답, 정답이었다. 거기다가 강호동을 이용한 유머 한 스푼까지! 정답을 넘어 훌륭한 답이었다. 그런데 이게 오답이었다니! 나와 아내는 비슷한 말을 몇 번 더 주고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차갑게 굳은 아내의 표정이 마스크와 모자를 뚫고 내게 전해졌다. 뭐지? 언제 이렇게 차가워졌지? 갑작스러운 한파에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내는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툭 던지고는 겨울왕국으로 들어가 유아차만 묵묵히 밀었다. 잠깐의 침묵, 잠깐의 정적, 휴가 중이던 나의 사고 수습 본부가 비상 대응 모드에 들어갔다. 뭐가 잘못된 거지? 눈이 와서 시댁에 못 가는 건 좋은 일 아닌가? 왜 좋은 일에 화가 났지? 아니면 내가 말실수를 한 게 있나? 특별히 기분 나쁘게 할 말은 안 한 거 같은데? 묵묵히 길을 걷던 우리 중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가고 싶은데, 그래서 고민하는 건데, 내 고민이 별 거 아니라는 거처럼 말해서 기분이 나빠.”
아내의 말을 듣고 요즘 읽고 있는 오은영 박사의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상대의 마음을 해결해주려고 할까요? 상대의 불편한 마음 이야기를 들으면 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에요.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을 들으면 내 마음이 계속 불편해져서 견딜 수가 없으니, 상대가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결국 내 마음이 편하고 싶은 거예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은 정서적인 억압입니다.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상대의 정서를 억압하는 거예요.
상대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그냥 좀 두세요. 흘러가는 마음을 가만히 보세요. 흘러가게 두어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도,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을 볼 수 있어야 감정이 소화되고 진정도 돼요.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조금은 알게 됩니다. ‘아, 지금 내가 불안하구나’ ‘아, 아이가 지금 기분이 좀 나쁘구나. 기다려주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은영,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김영사, 2020), 45
나는 아내의 걱정하는 마음이 불편했나 보다. 아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자꾸 하니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의 걱정하는 마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여 해결해주려고 했나 보다.
“음… 너의 말을 듣고 보니 오은영 박사님의 책 구절이 떠올랐고, 나를 반성하게 되었어.”
“반성? 뭐를?”
“오은영 박사님은 상대의 마음을 해결해주려고 하지 말래. 그냥 마음만 읽어주고 흘러가게 두라고 한 게 떠올랐어. 자기 마음은 자기가 소화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나는 너의 걱정하는 마음을 해결해주려고 했던 거 같아. 다음부터는 ‘눈이 많이 와서 걱정돼?’ ‘내일 가는데 위험할까 봐 걱정돼?’ 정도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오은영 박사님의 책을 읽고 인상 깊어서 밑줄까지 치고, 옮겨 적기까지 한 문장이었는데… 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놓치고 흘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잘못을 했구나. 이제 사과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거 아닌데.”
“응?”
“그렇게 말해도 나는 기분 나쁠 거 같은데.”
뭐지? 오은영 박사님도 오답이라고? 이제 나를 도와줄 선생님은 남지 않은 거 같은데… 다행히 아내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 가고 싶은데, 그래서 고민하는 건데, 나는 진지한 데 오빠는 진지하지 않으니까 짜증이 났어.”
“그러니까 자기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짜증 난 거라고?”
“그래. 도로 상태는 어떤지, 갈 수 있을 거 같은지 아닌지, 혹시 위험한 구간은 없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오빠가 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아서 짜증 났어.”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제인데, 왜 너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제니까 너도 진지하게 생각해라. 이런… 말인가?”
“그래, 그거야. 어…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게 되는 건가?”
피식, 마스크로 가려졌지만 분명 아내는 미소 지었다. 느껴졌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한 마디 뱉었다.
“폭군이야?”
“뭐?!”
우리 둘은 소리 내어 웃었다. 밖은 겨울 왕국이었지만 우리 둘의 마음에는 다시 봄이 찾아왔다.
“다음에는 이렇게 말해볼까? ‘그건 지금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내일 아침에 가서 확인하고 연락해주면 안 될까?’ 이렇게, 어때?"
“흠…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