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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L Nov 17. 2019

<쇼코의 미소> 따뜻하게 그려낸 결핍과 부재




쇼코는 나를 보고 조용히 웃었다.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였다.
다 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책 제목: 쇼코의 미소

저자: 최은영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16년 7월 7일

분야: 소설

가격: 12,000원

페이지 수: 296쪽








미리 보는 장단점

장점: 따뜻하고 잔잔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단점: 자극적이지 않아 취향을 탈 수 있다.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기준은 자주 바뀌었고, 지금도 바뀌고 있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에 '좋다'고 생각한 소설들은 대부분 서사에 힘이 팍 들어가 있고, 다이나믹하고, 자극적이었던 것 같다. 통통 튀고 입이 떡 벌어지는 장치가 있어야 생동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그러한 생각이 바뀐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를 접한 뒤였다.


평단의 호평이나 높은 판매 부수를 떠나 현재 내가 개인적으로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소설은 화자에게 깊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런 면에서 <쇼코의 미소>는 부족함이 없었다. <쇼코의 미소>는 총 7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져 있다. '쇼코의 미소', '신짜오, 신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영주', '먼 곳에서 온 노래', '미카엘라', '비밀' 중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쇼코의 미소',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미카엘라'였다. 특히 '미카엘라'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건 남자 어른들의 부재다. 소설에 남자가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가 없는 가족 구성이나, 감옥에 다녀온 후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 등 남자 어른들의 역할이 미미하다. 대신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 할머니와 손녀 사이의 유대감이 이야기를 이끈다. 조부모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주인공들은 대체로 착하고 순하다. 지독할 정도로 착한 주인공들은 사회 전반적으로 깔린 (어쩌면 폭력적이기까지 한) 통상적인 가치를 거부하거나 겉돈다.







7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이야기를 이끄는 요소는 이별이다. 결핍과 부재를 이토록 따뜻한 시선으로 그릴 수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이별 후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해후하는 이야기도 있고('쇼코의 미소', '신짜오, 신짜오'), 어떤 이별은 그저 이별 그 자체로 결착되기도 한다('미카엘라', '비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하기도 한다('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먼 곳에서 온 노래'). 서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이별도 있다('한지와 영주'). 결국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별을 기저로 드러나는 사람과 사람 간의 정서적 유대감인데, 이런 잔잔한 구심력이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라웠다.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은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 왜 도쿄로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쇼코는 나를 똑바로 보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_25쪽




쇼코는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할아버지의 일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 손짓과 표정에서 나는 위안을 느꼈고 쇼코로부터 위안받았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나는 일본에 갔을 때 쇼코에게 느꼈던 우월감을 기억했다. 너의 인생보다는 나의 인생이 낫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을 때. (...) 나는 쇼코의 그늘을 보지 못했다. _59쪽







<쇼코의 미소>는 아버지가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여성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매학교를 방문한 일본인 여학생 쇼코와 그녀의 파트너 소유가 어른이 되어가며 겪는 일과 공유한 감정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문제는 각자의 할아버지인데, 자신을 여자친구처럼 생각하며 지나치게 사랑을 쏟아 도쿄로 떠나지 못하게 하는 쇼코의 할아버지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지만 쇼코로 인해 작게나마 마음의 문을 연 소유의 할아버지가 공감과 유대의 드라마를 이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두 분 다 잃은 나이기에 이들의 이야기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할아버지에게 나는 종교이고, 하나뿐인 세계야.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어." _13쪽




나는 관계에서 격는 어려움 때문에 자주 골머리를 썩고는 했다. 쇼코와 소유의 이야기는 그런 고민을 가진 내게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타인을 100%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둘은 다시 만났다. 그리하여 그간 쌓인 오해도 풀고,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읽으며 소중했던 기억과 그들 사이의 놓인 시간의 공백을 따뜻하게 채웠다. 그리하여 나를 '아 역시 해피엔딩이구나. 드디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지레짐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라는 문장이 나오며, 나의 예측을 벗어난다. 왜 소유는 쇼코의 미소에서 서늘함을 느꼈을까? 결국 도쿄로 떠나지 못한 채 할아버지로부터, 그리고 고향으로부터 떠나지 못해 마음 한편이 부서진 쇼코의 미소를 보며, 소유는 자신이 쇼코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느낀다. 그녀의 그러한 감정까지는 쉽게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왜 마지막 해후의 장면에서 과거 소유가 쇼코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들었던 그 '서늘함'이 다시금 찾아온 걸까.


나름대로 고민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지금껏 살아오면서 맺은 수많은 관계들을 떠올렸다. 완전히 나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도 있고, 애매하게 경계를 타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곁에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유로 누가 남고 누가 떠났는지 하나씩 헤아려보기엔 이미 관계의 바둑알은 너무 많이 흐트러졌고, 스스로의 부족함과 과오를 솔직히 인정할 용기도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보며 하나씩 그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기 시작했고, 쇼코가 출국장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며 지은 미소에 소유가 서늘함을 느꼈던 것처럼 내 마음도 서늘해짐을 느꼈다.




사형이 집행되고 나서야 엄마는 엄마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_109쪽




모처럼 정말 좋은 소설을 읽었다. 다양한 단편들 속에서 느껴지는 최은영 작가의 시선이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깊이 고민하게 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쇼코의 미소>가 등단작이라니, 원하는 바를 잘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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