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행복한 글쓰기 공모전 금상(산문)
하트 손가락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그때의 감격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떨리는 목소리로 부모님과 장인어른,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건강한 딸아이가 태어났어요! 아주 울음이 우렁차요!”
아이는 태어날 때 손가락을 하나 더 가진 채 세상에 나왔다. 뱃속에서 받았던 기형아 검사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여분의 손가락이었다. 산후조리원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쏟아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손가락 하나 더 있는 육손은 우성 유전자라고 한다. 하지만 희귀질환으로 분류되며, 다지증이라는 병명을 가졌다.
직접 눈으로 보니 더욱 가슴이 저렸다. 산후조리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눈물로 얼룩졌다. 아이를 만나는 짧은 시간 동안은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으려 애썼다. 눈을 감고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흐느낀 날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방법을 찾았다. 매일 밤, 우리 부부는 손을 맞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의 힘을 믿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혹여 다른 장애나 합병증은 없는지 아이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다지증은 손가락 길이나 굵기가 다르게 성장할 수도 있고, 심장 질환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여분의 손가락 절단 수술이었다. 제주에서 아이를 출산했기에 먼저 제주에 다지증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 있나 찾아봤다. 제주에는 영유아 손가락을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수부외과 의사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육지로 수술을 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대구의 한 병원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어난 지 갓 두 달을 넘긴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온전히 태어나게 하지 못해 너무 일찍 비행기를 태운 게 못내 미안했다.
병원에서 아이의 손을 살펴본 의사는 물렁뼈가 이어지지 않았을 경우 100일 전후로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진료를 마치고 다시 제주로 돌아오고 나서는 일체 외출을 삼갔다. 혹시라도 감기에 걸려 수술이 미뤄질까 두려웠고,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부득이 외출할 때면 아이의 손가락을 손싸개로 감쌌다.
마침내 100일이 되어 다시 육지로 향했으나, 물렁뼈가 연결되어 있어 수술은 돌 무렵으로 미뤄졌다. 다시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버거웠지만, 더는 우리의 잘못으로 돌리지도, 숨기지도 않기로 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수술이 밀리고 나서는 마음을 한결 편하게 먹었다. 아이에게도 미안한 감정을 조금씩 덜어냈다.
아내도 조금씩 기운을 찾았고 제주에서의 육아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직장 때문에 오게 된 제주에서의 육아는 긴 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제주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었고 행복도 찾게 되었다. 아이는 손가락이 하나 더 있는 것 외에는 큰 이상은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하트 손가락이라고 이름 지었다. 엄지손가락이 붙어있어 하트 모양처럼 보였고, 이름이라도 귀엽게 불러주고 싶었다.
돌이 될 때 즈음,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입원 후 수술을 마치면 경과가 좋아질 때까지 열흘간 병원에서 머물러야 했다. 아이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하트 손가락은 말끔히 제거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흉터도 점차 옅어질 거라는 희망찬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예기치 못한 폐 쪽 질환이 발견됐다.
폐쇄부전과 폐동맥협착증으로 아이의 심장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다행히 당장은 수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6개월 후 경과를 지켜보자는 소견이 나왔다. 우리 부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정말 심각했다면 당장 치료를 해야 했지만, 무려 6개월 후에 보자는 건 괜찮다는 뜻일 거라고 위안 삼았다. 어려웠던 수술과 여러 번의 장거리 이동을 버텨내는 아이를 보며 우리 부부도 점점 단단해졌다.
수술을 마친 아이는 두 달 동안 보조기를 차고 지냈다. 처음엔 어색해하고 불편해했지만, 금세 적응하여 밝게 웃으며 놀았다. 씩씩한 아이의 모습에 우리 부부도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에게 본이 되고자 더욱 씩씩하게 살았다. 더는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지도, 자책하지도 않고 죄책감을 내려놓았다. 이 모든 게 은혜라 생각하며 지냈다. 아이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아이는 남들보다 걷는 건 느렸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엔 내심 걱정이 있었다. 16개월이 지났을 무렵, 아이는 마침내 한 걸음 내디뎠다. 한없이 소중한 한 걸음이었다. 그 작은 발걸음이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엄마,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렇게 잘 자라고 있어요.”
아이의 걷는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는 또 한 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슬픔에 잠겼던 시간이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 부부를 더욱 가깝게, 단단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아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했고, 씩씩했고, 잘 자라주었다. 조급해하고 가슴 졸인 순간을 생각하면 아이에게 괜스레 미안하다.
하트 손가락을 갖고 태어난 우리 아이를 통해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그 가족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편견과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했을까.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도 여간 힘들었을 것이다. 틀린 게 아니라 조금 다른 것일 뿐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불필요한 관심을 그들에게 주고 있다. 위로를 건넨다는 말이 도리어 상처로 다가온 적이 있고, 관심을 준다는 표현이 오히려 부담되었던 적이 있다.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장애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지고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개선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우리 아이가 하트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바람이 더욱 커졌다. 장애 인식 개선의 첫걸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장애인을 향한 생각과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평범함과 비평범함,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는 기준은 과연 누가 만든 걸까. 오히려 배려한다며 경계를 나눈 그 기준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벽을 만든 것은 아닌지, 배려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진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차별과 편견 없이, 서로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품어주는 사회, 배려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복을 나누며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