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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Dec 19. 2018

도쿄에는 돗판인쇄박물관이 있다

나만의 책문화공간을 꿈꾸며

2108 예술배낭여행

- 나만의 책문화공간을 꿈꾸며 2/3


도쿄에는 돗판인쇄박물관이 있다
 



도쿄에는 돗판인쇄박물관이 있다. 구글 지도가 목적지라고 가리킨 곳은 겉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박물관처럼 보이지 않는 대기업의 고층 빌딩이었다. ‘活版 TOKYO’가 열린 행사장도 진보초 빌딩이라고 우리나라의 여의도 같은 느낌의 지역에서 열리더니 뒤이어 찾은 ‘인쇄박물관’도 그런 느낌이라 도쿄가 일본의 수도이자 대도시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의아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건물이 현대적일 수야 있겠으나 이렇게나 고층빌딩과 인쇄는 역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1층 P&P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서도 가시지 않았다. 선생님이 적극 추천한 곳이 이곳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딱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1층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던 중 그제야 들어오자마자 살폈어야 할 브로슈어를 발견했다. 브로슈어를 통해 내가 찾던 그곳은 지하 1층에 있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입장료 300엔을 지불하고 전시실에 들어선 이후에야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지하 1층에 자리한 전시실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제1전시실에서는 상설로 인쇄의 역사에 대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천장이 높아 벽면이 무척 넓었는데 그 드넓은 벽에 의미 있는 자료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몇몇 자료의 경우 실물에 가까운 모조품을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어 두었다. 작년에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관에서 보았던 인쇄의 역사 전시도 그러했는데 이곳의 인쇄의 역사 전시 또한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전시였다. 여기서 말하는 입체라 하는 것은 요즘 트렌디한 VR이나 3D를 말하는 것이 아닌 사진이나 그림 자료 대신 실물을 비치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인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전시는 이미 아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제2전시실에서는 일본의 인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실물자료와 영상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동양과 서양의 인쇄 역사를 비교하여 놓는가 하면 일본에 서양 인쇄술이 언제 어떤 사람에 의해서 어디로 들어왔고 어떤 사람의 인쇄 산업에 있어서 발전을 이끌고 하는 등의 내용 등이다. 영상자료는 일본어,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 버전도 있었다. 시간 여유만 있다면 하루 종일 이곳에서 있으라고 해도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볼거리가 풍부했다.
 
내가 특히 ‘진짜 잘해놓았구나’하고 생각했던 곳은 제2전시실 한쪽 구석에 유리로 분리되어 있는 공간이었던 ‘인쇄의 집’이라는 곳이었다. ‘인쇄의 집’은 활판인쇄 워크숍을 운영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였다. 평소에는 관계자 및 프로그램 참가자만 출입이 가능하고 일반 관람객은 유리 밖에서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유리는 분리된 공간이면서 분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일정이 맞지 않아 프로그램 참여는 하지 못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왔고 나 또한 이러한 분야에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니 특별히 내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 안에는 책에서만 보았던 ‘벤톤 자모 조각기’가 있었다. 참고로 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활자를 만드는 틀인 자모 활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 기계는 그 자모 활자를 만드는 기계다. 쉽게 말해서 활자의 엄마가 자모 활자이고 이 기계는 활자의 할머니 급이라고 보면 된다. 이 기계뿐 아니라 활판인쇄기의 원형에 가까운 알비온 프레스와 그밖에 다양한 활판인쇄 기계들을 볼 수 있었다.

좌) 벤톤 자모조각기, 우) 알비온 프레스


그러나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앞서 말한 이러한 기계들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활자를 이용해 카드나 명함을 만들 수 있는 활판인쇄기와 작업대가 스무 개나 마련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것이 이 공간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지 아는 나로서는 이러한 시스템을 갖춘 것이 무척 대단하게 여겨졌다. 워크숍은 주기적으로 진행되며 모든 프로그램은 재료비 없이 무료로 진행된다고 했다. 재료비도 받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했고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나는 조심스레 ‘돗판’이라는 인쇄회사에서 수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에 관심을 갖고 투자하는 이유를 물었다. 허나 내 질문에 대한 답 대신 그저 자신은 월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진 이야기에 더 놀라웠다. 자신도 처음엔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자신과 같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친구들 몇몇은 몇 개월 정도 이곳에서 수련 생활을 하며 공부를 해서 기술을 익혀 자신의 결과물을 만들고 있고 그들이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여간 반갑지 않았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시스템을 갖추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정말 부럽다’는 이야기를 열 번 정도 한 듯하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다양한 일에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잘 어우러질 때 가장 이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곳은 이 두 가지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만 많이 들여서 비싸고 유명한 것을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닌 공간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공간을 구성하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서 전시품을 준비하여 전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관심이 없으면 투자하지 않고 아무리 관심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투자하지 못한다. 허나 현실에선 앞서 말한 것처럼 명확하게 한쪽으로 기울기보다는 대체로 깊지 않은 관심 혹은 충분하지 않은 돈이 주어지기 마련이고 그럴 경우 겉으로 보이거나 일반적인 것 일명 안전빵에 투자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일이나 나의 생각은 이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 지금 당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더라도 믿을만한 혹은 가치 있는 콘텐츠에 대해서는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좀 더 간절해졌다.


돗판인쇄박물관은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은 아니겠지만 이 분야의 사람들에겐 성지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많은 사람, 모든 사람이 좋아할 만한 대중적인 공간도 필요하지만 한 분야의 이런 공간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각각의 분야마다 이러한 공간이 생긴다면 세상이 훨씬 재밌어질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 필요한 일이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은 누군가가 하고 있다는 것은 꽤 고마운 일이다. 경제논리로 접근했을 때 개인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을 여유가 있는 기업에서 하고 있다는 것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계산기만을 두드려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니 비용만을 계산하는 계산기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의 값을 계산할 수 있는 슈퍼 계산기를 두드렸을 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진 촬영 금지 안내판 (인쇄의 집은 사진 촬영 가능)


이곳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곳인지 사진 자료와 함께 이야기를 전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한다고 해서 미술작품처럼 작품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안 되는 것이냐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책공방 또한 올해부터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공방에서 사진 촬영을 금한 이유는 쾌적한 관람환경을 위해서이다. 사진 촬영이 보편화, 일상화된 요즘 시대에 역행한다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으나 책공방은 사진 촬영을 금하고 관람 분위기가 무척 많이 바뀌었다. 사진 촬영만을 위한 관람객들은 빠른 속도로 공간을 스쳐 지나갔고 사진 촬영을 하고자 기계를 작동하는 모습을 연출한 사진을 찍기 위해 기계를 만지는 관람객이 줄어들었고 그러자 격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은 줄고 찬찬히 공간을 음미하는 분들이 늘었다. 무분별하게 사진을 찍고 그것을 SNS 자랑처럼 올리거나 우리와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양 올리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한 게시물들은 우리 공간에 오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 주기보다 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만들어 주는 듯했다. 실제 우리 공간에 와보지 않고도 우리 공간에 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질 것 같았고 저작권의 문제도 있었다. 사진 촬영이 안 된다고 서운해하시는 분들도 있고 SNS를 통한 홍보효과는 현저하게 줄었을지도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잃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나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커서는 안 된다. 작은 것을 얻고나 큰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와 선생님은 사진 촬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크다고 판단했다. 아마도 이곳도 책공방에서 나와 선생님이 했던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자료를 함께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이 이야기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가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인쇄의 집’을 포함해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야 볼 수 있는 인쇄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들였을 시간과 정성과 비용을 가늠해 보았을 때 300엔(3000원)이라는 입장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이런 전시를 본다고 해서 이것들을 물질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을 보기 전의 나와 이곳을 보고 난 후의 나는 분명 3천 원 이상의 가치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어떠한 공간을 접할 때는 그 공간에 담긴 가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림을 볼 때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그림이 내게 주는 느낌은 어떠한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공간을 방문할 때도 그림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 공간을 왜 이렇게 구성하였을까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하였을 때 이 공간은 내게 너무나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올해는 책공방에게도 나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한 해였다. 큰 위기를 겪었다. 나의 위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이번 위기는 나에게 있어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위험보다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공간이 어떠한 기준이나 원칙 또는 합의 없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여 그동안 쌓아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었다. 이 위기를 겪기 전까지 나의 장기적인 꿈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지금의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지금과는 포지션이 달라질지 모르지만 할머니가 되어서 지금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마을이 처음 생기는 과정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위기를 겪으며 이 노선에 문제가 생겼고 이로 인해 예전부터 생각은 해왔지만 미루기만 했던 일들에 속력을 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도쿄에 갔고 도쿄에서 돗판인쇄박물관을 보았다.

내가 책공방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서 떠나고 월급이 적어서 떠나고 미래가 없어서 떠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떠나지 말라는 이야기 대신 ‘잘 '됐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있는 공간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원칙이 없고 월급이 적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이 떠날 때마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자리를 지켰던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지역에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만큼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돗판인쇄박물관을 보며 흔들리던 나의 꿈을 다잡았다. 어떠한 분야가 성장하는 데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그 투자에는 경제적인 투자도 있겠으나 인적 투자로 어떤 사람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선생님이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 우리 선배들이 사용했던 책만드는 기계와 도구들이 고철로 팔려나가 사라지는 것을 막아 지금 우리가 이렇게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게 하였듯 나 또한 이곳에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며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기록하고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이 너무나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저 소비자로서 그것을 즐기고 싶은데 아무도 그것을 만들어 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책 문화 공간을 꿈꾸고 있지만 내가 꿈꾸는 그것을 실현하는 공간이 있다면 그런 공간에서 일을 하거나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런데 현재 그러한 공간이 없으니 특히나 내가 사는 곳에 그런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나라도 만들어 보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 이런 멋진 공간이 있다면 나는 내게 설명을 해주었던 직원처럼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오래오래 일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내가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즐겁다고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


참고 > 본 기록은 완주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예술인 성장지원 '예술배낭여행'에  '책문화공간을 꿈꾸며'라는 주제로 선정되어 경비를 지원받아 떠났던 여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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