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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Aug 06. 2023

서울이여, (잠시) 안녕

일정 확인을 위해 달력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벌써 서울에서 내려온 지도 3주가 지났네."


연달아 출근하는 날에는 역에서 내려 도서관을 지나 그렇게 3층으로 올라갈 것 같은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씻고 에어팟을 빼 거실 아일랜드 탁자에 놓고 에어컨을 켤 것 같은데, 행거 하나에 매트리스 하나 있는, 너무 단출해서 사람이 사는 게 맞나 싶은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것 같은데, 그 집은 이제 없다.


처음 집을 구할 때는 5년 전이었다. 근무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 오빠가 강남에서 출퇴근하는 걸 못 참겠다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살자!"

친오빠와 나는 평소 사이가 나쁘거나 어색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보다 돈이 많은(난 돈이 없다) 오빠에게 얹혀살면 적당한 곳에 투룸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빠에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더욱이 친오빠 업종 특성상 나보다 늦게 출근하고 밤 11시~12시가 되어 퇴근하기 때문에 같이 사는 집에서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은 점도 좋았다. 


처음에 얻은 집은 신촌에 있는 투룸 빌라였다. 내 나이보다 훨씬 많은 형님 같은 느낌의 구옥이었지만, 등본을 다 떼어본 오빠 말로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집 이랬다. (그게 그거 아닌가) 어쨌든 이 사회는 혈육이건 뭐건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돈 많이 내는 오빠는 거실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큰 방에서 지냈고, 월세 35만 원을 내는 나는 미닫이문, 소위 자바라 문으로 된 베란다 같은 곳에 매트리스 하나, 그리고 다이소 행거 하나를 놓고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서울살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 외로운 시간들이었다. 집에 나와서 살아본 건 22살 미국 기숙사에 있을 때였는데, 그 당시 감사하게도 22살 아직 어린 나를 기숙사 사람들이 무척 귀여워해 줬고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딱히 외로울 틈도 없었다. 맛있는 밥 먹고, 맛있는 술 마시고, 적당히 산책하고, 책 읽고... 얼마나 멋진 삶인지,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고 오히려 몇 년 머물고 싶은 지경이었다.


여하튼, 서울살이는 좀 달랐다. 고독했다. 무엇보다 출퇴근 왕복 4시간 40분을 잡아야 하는 나는, 본가에 오면 밥 먹고 씻고 자기에 바빴는데 서울살이를 하니 퇴근까지 20분 컷. 집에 와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서랍장 같은 걸 사서 열심히 조립했지만 막상 다 조립하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을 하다 만난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아, 서울에 집이 있으니 이렇게 늦게까지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눌 수 있구나.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강아지를 보지 못해 생긴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 생각보다 자주 본가에 갔다. 


3년 뒤 이사를 갔다. 회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전에 비해 주변이 깨끗했고 외관과 내관이 훌륭했다. 이번 집에서도 내 방은 아주 작은방이었지만 자바라가 아닌 진짜 문이 있어서 좋았다. 인스타 방 꾸미기처럼 예쁘게 꾸미고 살아보자고 결심했는데 2년 동안 전혀 꾸미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정말 인테리어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커튼을 달자는 오빠의 말을 무시하고 내 방 창문에는 신문지를 붙여놓을 정도였으니까. (가릴 용도면 신문지나 커튼이나 내 눈엔 그게 그거다.)


두 번째 집에서는 측간 소음에 시달렸다. 소음이 얼마나 심한지 그 집에 가면 밤을 꼴딱 새웠다. 옆집 사는 미친 여자는 제정신에도, 술을 마시고도 소리 지르고 노래를 불렀는데, 하룻밤 사이에 경찰이 세 번 온 적도 있었다. 이게 우리가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물론 깡통전세사건 이후, 같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의 퀄리티가 매우 낮아 서울이란 도시에 학을 떼고 본가로 도망쳤지만, 옆집 여자의 행패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내 방에서는 왼쪽 집에서 나는 부부와 장모님의 싸움 소리도 들렸다. 1주일에 한 번씩 사위와 장모가 싸웠다.) 


그동안 서울 집이 있음에도 회사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었다. 말할 필요를 딱히 느끼지도 못했고, 더욱이 나는 본가와 서울을 오고 가는 생활을 자주 했기 때문에 서울 집에서 자는 날은 평균 3.5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코로나 때는 2년 동안 풀 재택근무라 더더욱 가지 않았고) 그래서 서울에서 산다고 말하기가 좀 머뭇거려졌다. 그럼에도 내 인생에서 아마 다시 오지 않을 서울 생활을 떠올리니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안 그래도 초여름 20분 정도 집까지 걸어가면서 마음이 뭔가 서글펐다. 마지막 서울, 마지막 집, 내가 만약 다시 서울에서 산다 해도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때 길거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연등을 따라 집까지 걸어갔던 그 길들이 나지막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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