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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Jun 02. 2021

아무 생각

1.

요새 나는 짬뽕에 빠져버렸다. 계기는 단순했다. 같은 팀 동료가 내가 시킨 짬뽕의 2/3을 먹은 덕분에 나는 짬뽕에 대한 갈망을 느꼈다. 마치 어린 시절 형제들에게 먹을 것을 뺏겨 성인이 되어서도 특정 음식을 갈망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10일 중, 5일. 출근하는 날마다 나는 짬뽕을 먹으러 중국집으로 향했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오늘도 짬뽕을 먹었다. 오늘 짬뽕은 매웠다. 하지만 질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일까? 다행이라 생각하자.


2.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가 주는 감각을 잊고 살은지 오래다. 시험에서의 '불합격'. 이 세 글자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운동하면서도 피식, 걸으면서도 피식, 달리다가도 피식 웃었다. 저 세 글자가 주는 임팩트가 상당히 컸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불 합 격. 너 는 불 합 격'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아. 나는 불합격 인간이다. 그랬다. 지금 뒤돌아보면 그렇게 길지도 않았던 1년이라는 취준생 기간이 나에게 10년처럼 느껴진 건, 내가 반기별로 100개의 불합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3. 

두부에게 깨물렸다. (두부는 개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드럽고 구수하고 부드럽고 몽글하고 부드럽고 아주 부드러운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 좋아서 뭉개듯 얼굴을 문질렀다. 뭉개고 짓누르고 숨 막히게 하고 못 도망가게 꽉 껴안았다. 끄으으으 소리를 냈다. 감자는 정말 아기 같아서 끄으으으 정도에서 멈추지만, 두부는 어른스러워서 끄으까아꾸왁 하더니 나를 물었다. 그래도 귀여워서 둥그렇고 하얗고 뭉글뭉글하고 보송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꾸욱 뭉갰다.


4. 

요새는 사춘기, 오춘기가 왔다. 그래서 누가 말을 걸어도 시큰둥하다. 마스크를 껴서 다행인 거 같다. 아니면 뒤집은  브이 자를 하고 있는 내 입이 적나라하게 보일 테니까. 요새는 육춘기. 그래서 모든 게 다 고깝게 보인다. 요새는 팔춘기. 그래서인지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모든 걸 지우고 그냥 사라지고 싶다. 불가능하단 걸 알아서 하는 말이다. 난 손에 쥐고 있는 게 많고, 손에 많이 쥐고 있어도 불안하다.


5.

편두통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다. 세상에 편두통 환자가 정말 많다. 보이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분들도 많다. 최근 편두통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에서 말이다. 그 결심은 간단했다. 정말 간단했다. 미가펜이 단종돼서다. 몇개씩 우걱우걱 먹으면 강도 8인 내 고통을 잠재우던 진통제의 단종은 지난 2월 내 삶을 통째로 흔들었다. 아껴먹고, 아끼고, 아껴서 미가펜 일곱 알을 고이 집에 모셔두고 있다. 서울에, 그리고 집에.


6.

다시 운동을 시작했는데 내 팔 근력은 1g에 가깝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원래 스피드 스케이터였던 나는, 당연히 근력이 하체에 몰렸음을 알고 있었으나 상체에 이렇게 힘이 없음을 삼십사 년 만에 알게 된 거다. 팔운동을 하다가 '이러다 팔이 부러지겠어' 싶어서 (전혀..) 운동을 중단하고 1주일 근육통으로 머리도 못 묶었다. 그런데 어제! 1시간 내내 상체운동만 했는데! 가슴과 겨드랑이만 좀 아플 뿐, 팔은 전혀 안 아파서 운동하면 정말 근육통이 사라지는구나,라는 매직을 경험했다. 그리고 오늘은 또 운동 쉬어버리는 내가 참 대단하네.


7.

입이 꿈틀거린다. 그 속에서 뱀 같은 불만이 나오려고 한다. 참는다. 잘 참다가 누군가 나에게 뱀을 던지면 내 속의 뱀도 같이 터져 나온다. 이 패턴이 참 싫어서 그냥 모르는 사람 속에 숨어 있고 싶다. (그럼 말을 안하게 될테니) 그런데 사람이 홧병에 안 걸리려면 이렇게라도 몸속의 뱀들을 내보내야 하는데, 가끔 내 속에서 나온 뱀들이 역겨워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가 싶다가도, 뭐가 문제인가 싶다가도, 머리도 몸도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빡세게 굴리면 이 뱀들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8.

생각보다 연재하는 만화의 성장 속도가 더디다. 꾸우우물, 꾸우우우우물, 한 명씩 팔로워를 늘려가고 있다. 감사한 나의 팔로워들. 요새는 팔로워도 돈 주고 살 수 있는지 악마의 계교 같은 제안이 들어온다. 솔직하게 사고 싶지만 돈이 없다.


9.

예술의 전당에 간 날, 생각난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씁쓸했다. 카레를 먹던 아비꼬도 몇 년 전 그대로라 씁쓸했다. 에잇, 차라리 없어져라. (농담입니다) 스타벅스도 그대로라 씁쓸했다. 모든 게 그대로라 기분이 별로였다.


10.

뭐라 쓰는지도 모르게 졸리다. 요새 읽는 책은 트레버 노아(Trevor Noah)의 '태어난 게 죄'(Born a Crime)이다. 책을 본 첫인상, '태어난 게 죄' 너무 슬펐다. 제목이 이리 슬플 수 있나 눈물이 났다. 책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진다. 책은 재밌고 인상 깊고 마음을 울린다. 그의 나이가 나랑 4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 모두 각자 다른 경험을 한다는 거, 내전이나 분쟁한 번 겪지 않고 무탈하게 자랐던 나를 보며 갑자기 이 환경에 감사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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