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흰

문학동네 (230101~230417)

by bookyoulovearchive


흰 것들을 준다는 건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새것', '깨끗한 것', '순수한 것'의 느낌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걸 다 종합하면 좋은 것만을 주고 싶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녀는 너무 추워서 바다가 얼어 있는 풍경을 본 적 있다. 수심이 낮고 유난히 잔잔한 바다였는데 해변에서부터 파도들이 눈부시게 얼어 있었다. 켜켜이, 하얀 꽃들이 피다가 멈춘 것 같은 광경을 보며 걷자니 모래펄에 흩어진 얼어붙은 흰 비늘의 물고기들이 보였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그런 날을 ’바다에 성에가 끼었다'고 한다고 했다. (p.47, ‘성에’)

바다도 얼 수 있구나 깨닫게 해 준 구절. 추운 겨울날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이 나 눈이 부시다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하늘처럼 파도도 눈부시게 얼 수 있구나 생각했다.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p.54, ‘눈송이들’)

'흰' 것과 '검은' 것들의 대비가 좋았던 문장.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쌓인 눈을 예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이라 표현한 것이 색달랐다. 어쩌면 나뭇가지들에게 아무리 작은 눈송이라 할지라도 그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까?


’입김‘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살짝이나마 만져볼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겨울이다. 그저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로 공기 중에 하얗게 피어난 입김이 우리가 살아있다고, 따뜻하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겨울엔 종종 의식적으로 입김을 만들어 내본다. 나의 숨을, 또 안녕을 확인하고 싶어서.


‘은하수’

서울의 빛공해 사이에서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가끔 매우 반짝이는 것을 하늘에서 발견하더라도 잠시 뒤 그것이 비행기 불빛이거나 인공위성의 불빛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쏟아지는 별빛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알알의 소금 같은 수천의 별들’이라는 표현에서 후라이팬에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소금들을 상상하며 조금 웃어버렸다. 얼마나 별들이 고운 가루처럼 보이기에 작가가 '소금'을 별에 비유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각설탕’

기억, 시간, 고통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보니 요즘 매우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떠올랐다. 우리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며 완벽히 공감할 수도 없다. 그저 이해하는 흉내를 내는 게 고작일 것이다. 때로는 이해와 공감보다 인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어떤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도 고통 그 지체로 남아 있다면,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치유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바꿀 수 없는 기억으로 괴로워하기보다 나의 고통, 상처를 인정하고 그다음 단계로 내가 앞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있는 기억을 억지로 훼손시키려고 하기보다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나가는데 집중하자는 것이다.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불빛들’

나는 잠을 깊게 자는 편이라 캄캄한 새벽에 그 어두운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는 태양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태양이 뜨기 전의 하늘이 제일 어둡다고들 흔히 표현하는데 작가가 그 어두운 하늘을 서서히 밝히는 빛을 '암흑의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스며 나오는 것'이라 표현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표현이다.


‘빛의 섬’

예전에 학회에서 연극 무대에 오른 적이 있었다. 무슨 배역을 맡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순간 관객석이 어둠에 잠겨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는 것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무대에 오르게 되고 관객석에 앉은 이들은 내 인생의 주변인이지만, 그들이 나와 같은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무대를 관람하고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무대에 오른 이상 오롯이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갈 것인지, 혹은 그저 객석에 아무도 없다고 믿고 홀로 무대를 꾸려나갈 것인지 말이다.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그러므로 결핍은 충만함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로 이어진다. 이 초과를 위해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질 뿐이다. (p.164-165)

아직 읽지 않은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많아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질문의 서사는 아쉽게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텅 빈 것 같이 보여도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색, 흰색. 근본에 결핍이 있어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인간이지만, 오히려 초과로 이어지는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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