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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youlovearchive Sep 12. 2023

개브리얼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문학동네 (230902~230910)



그러나 인생은 끊임없이 다다르는 것이다. 지나야 할 또다른 문이 어김없이 있다. (물론, 더이상 없을 때까지.)


| 시작하는 말:

세상엔 오직 사랑뿐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것뿐

한데 그걸로 됐어, 화물열차의 무게는

레일이 골고루 나누어 져야지

— 에밀리 디킨슨


| 첫 문장: 메이저가 스스로를 메이저라 칭하기 전에는 샘슨 메이저였고, 샘슨 메이저Mazer이기 전에는 샘슨 매서Masur였으며 — 단 두 글자를 바꿈으로써 겉보기에 멀쩡한 유대계 청년에서 세계 창조 전문가로 변신했다 — 어린 시절에는 샘이었고, 할아버지 가게에 있는 <동키콩> 오락기 속 명예의 전당에는 S.A.M.으로 올랐지만, 어쨌든 대체로는 샘이었다. (p.13)


(23/09/11) 어린 시절 게임을 통해 친구가 되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사이가 멀어졌던 샘과 세이디. 각자 하버드와 MIT로 진학한 두 사람은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마주치게 되고, 그 만남을 계기로 함께 게임을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든든한 조력자 마크스와 함께 그들은 <이치고: 바다의 아이>라는 게임을 만들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그 후 다른 게임을 만들며 샘과 세이디는 계속해서 갈등을 겪고, 결국 게임을 함께 만들지 않게 되기도 하며, 수술, 사랑, 그리고 총기사건 등 엄청난 사건에 직면하기도 한다.


  샘과 세이디 모두 그들이 만드는 게임에 자신들의 이야기, 자신들이 그리는 이상향 등을 담는다. <이치고>는 고통과 흉터에서 자유롭고 싶은 샘의 소망이 담긴 캐릭터 이치고가 길을 잃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치고의 어머니가 자식을 잃은 것처럼 세이디가 아이를 잃은 경험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계의 양면>의 메이플타운은 샘이 과거에 겪은, 그리고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마스터 오브 더 레블스>은 게임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세이디의 믿음이 담긴 게임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샘은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세이디가 게임을 플레이할 모습을 그려보며,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번 문지방을 넘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개척자>라는 게임을 만들어낸다.


게임을 디자인하는 일은 결국 그 게임을 플레이할 사람을 그려보는 일이다. (p.45)


———······———······———


  개인적으로는 샘과 세이디의 사랑, 샘과 마크스의 사랑, 세이디와 마크스의 사랑의 형태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꼭 로맨틱한 관계만이 사랑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느 누가 샘과 세이디의 사랑, 샘과 마크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특히 샘과 세이디의 사랑은 이 소설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다. 서로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샘과 세이디는 사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꽤 많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빛과 어둠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각자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끔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를 주는 심한 막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를 염려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다.


(...) 세이디는 샘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북받쳐올랐다 — 둘에 결국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염려할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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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읽으며 ‘선택’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샘이 다치지 않아 병원에서 세이디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약 둘이 우연히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약 둘이 함께 게임을 만들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만약 오퍼스가 아닌 셀러도어를 선택했더라면? 만약 그들이 캘리포니아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세이디와 마크스가 함께 일본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마크스가 로비에 응대를 하러 가지 않았더라면? 세이디가 매직아이 책을 샘에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책 속 인물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수많은 문 앞에서 선택을 하고,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많은 것들이 우연과 운명에 좌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이디는 샘에게 ‘그들이 만날 수 있는 다른 길은 무한히 있었고, 결국 샘의 인생 게임에 다른 식으로 어떻게든 나타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이디의 말처럼, 그들이 정말 인연이고, 운명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만나게 될 순간은 반드시 찾아왔을까?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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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운 작가님의 단편소설 「한밤에 두고 온 것」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결국 ‘오늘 또 오늘 또 오늘’이 될 것이다. 내일이 오늘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비극과 절망 후에도 반드시 내일은 오고, 사랑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


  다시 맨 처음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돌아가 본다.

  세상엔 오직 사랑뿐이고,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건 그것뿐이라는 화자의 말.

  그러나 살아가고 사랑하면서 겪는 비극과 절망, 고통과 삶의 무게는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골고루 나누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이 된 오늘, 사랑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출판사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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