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즈덤하우스 위픽 (e-book, 231010)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 첫 문장: 강선을 통과한 탄환이 일으키는 회전의 감각이 팔꿈치를 타고 나선형으로 흐른다. (p.5)
(23/10/10)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으로, 조각(爪角)이 어떻게 킬러가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단편이다. 아직 『파과』를 읽지 않았는데 『파쇄』 -> 『파과』 순으로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심장 한가운데 도달해보기는커녕 아직 피 한 방울 묻혀본 적도, 무언가를 썰거나 끊어본 적도 없는 깨끗한 칼날’(p.13) 같았던 어린 ‘조각’이 그를 가르치는 스승이 ‘지시하거나 재촉하는 대로 변해가며 그가 바로잡아야 하는 몸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그의 몸 자체가 되어’(p.33) 마지막에는 결국 ‘과녁 아닌 생명을 쏘며 약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p.42)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파과』의 60대 킬러 ‘조각’의 삶을 너무나도 궁금하게 만든다. 돌이킬 수 없는 한 번의 총성,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이전의 삶. 『파쇄』와 『파과』 사이 ‘조각’의 삶에는 무수한 파괴가 있었을까? 그 사이 시간의 이야기도 문득 궁금해졌다.
구병모 작가님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소설의 문장들 역시 매우 감각적이고 유려하단 생각을 했다. 생생히 만져질 것 같은 문장들. 그건 내가 계속 구병모 작가님의 소설을 읽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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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둘 다 아니다.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p.6)
| 앞으로의 일을 하기 위해 그녀가 되어야 하는 몸, 이룩해야 하는 몸을 부단히 주입시키며 존재 자체를 전지(剪枝)하여 죽음의 과수원을 가꿀 것이다. (p.16)
| 손에 쥔 금속이 땀으로 미끈거린다. 그리고 어쩌면 기회는 한 번이다. (...)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눈앞이 맵다. 이걸로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 손안에 쥔—애당초 쥔 게 있었던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과일과 같은 세상은 씨앗조차 남지 않고, 과육은 진작 분해가 끝난 시신과 같이 흔적도 없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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