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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Jan 28. 2019

문맹보다 심각한 금융 문맹

다 쓰고 남은 걸 저축하는 게 아니라
저축하고 나서 남은 게 있으면 써라.
- 워런 버핏



  “아빠, 내 노예들은 일을 너무 안 하는 것 같아.” 

      

  자신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던 아들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들의 전 재산인 70만 명의 노예들이 1년 동안 벌어들인 돈이 고작 500원 정도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지금 까지 열심히 일을 해 자신을 대신해 일할 노예를 만들었는데 정작 그 노예들이 벌어들인 수입이 변변치 않다는 것에 큰 실망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들 녀석의 통장이 정기예금 통장이 아닌 보통예금 통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건 네가 네 노예들이 일하는 은행과 약속을 하지 않아서야.”  

     

  아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도대체 은행하고 무슨 약속을 해야 하는 건데?”  

     

  “1년 동안 네 노예들을 데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시키겠다고 약속하면 지금 네가 받은 이자보다 스무 배 정도는 더 줄걸?”       


  스무 배라는 말에 아들 녀석의 눈이 반짝였다. 수시 입출금이 가능한 보통예금 통장의 연 이자율은 0.1% 정도였고, 1년 만기 정기예금의 연 이자율은 2% 정도였으니 스무 배가 틀림없었다.  

     

  “나 그럼 은행이랑 약속할래!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은행의 대표적인 금융 상품에는 예금과 적금이 있다. 이를 통틀어 저축이라 한다. 은행에 돈을 맡겨 놓으면 이자가 발생한다는 사실 쯤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금과 적금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금융 문맹자들이 생각보다 많으며, 나 또한 그 금융 문맹자들 중 하나였다.   

    

  얼마 전, 내 아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1년 동안 기다려온 정기예금의 만기가 도래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오늘 점심은 자신이 사겠다며 함께 정기예금을 찾으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은행에 도착해 먼발치에서 아내가 창구에 앉아 은행 직원과 얘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 있던 아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와이프가 가져온 예금 만기 명세서 덕분이었다.   

  아내는 300만 원을 연 이자율 1.5% 조건으로 1년 동안 은행에 맡겼고, 명세서에는 ‘세전 이자 45,000원’, ‘이자 과세 15.4% - 6,930원’, ‘세후 수령 이자 38,070원’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아마도 아내는 이자가 38만 원쯤은 불어 있을 거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38,000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1년의 기다림을 감안한다면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되었나 보다. 만약 아내의 약속대로 오늘 점심 식사로 2만 원 정도를 소비한다면 1년 치 이자 수익중 절반 이상이 입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내 아내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가 금융 지식에 있어 열 살짜리 아들 녀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정기예금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었더라도, 자신이 1년 후에 얼마 정도의 이자를 수령할 수 있는지 미리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실망을 했다는 것은 미리 이자 계산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노예들을 1년 동안이나 방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아내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저 저축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스스로 훌륭한 일을 하는 거라 생각했을 것이고, ‘1년 동안 은행이 알아서 이자를 잘 불려 주겠지.’ 라며 막연한 기대를 했음이 분명하다. 이자 소득에는 15.4% 라는 어마 무시한 세금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또 제1금융권인 은행에 예금을 맡기는 것보다 지역 농협이나 저축은행 같은 제2금융권에 예금을 맡기는 것이 더 많은 이자 수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유명하고 망할 염려가 없는 큰 은행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이 규모가 작은 저축은행보다는 내 돈을 맡기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인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판단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대출 심사가 엄격한 은행 대신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높은 금리의 이자를 내고, 굳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집 앞 큰 은행에서 예금을 하는 것이 금융 문맹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들이다.  

  내 아내가 아무리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는 저축은행이라 할지라도 ‘예금자 보호법’에 따라 5천만 원 까지는 큰 은행과 다름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높은 금리의 정기예금 상품을 마음대로 고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1년을 인내한 실망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들 녀석의 바람대로 그의 전 재산 70만 원을 1년 만기 정기예금 상품에 가입해 주기로 하고 인터넷 뱅킹에 접속했다. 아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정기예금 상품은 100만 원 이상 가입이 가능합니다.’    

   

  인터넷 뱅킹 화면 위에 고지된 문구였다.       


  “70만 원은 안 받아 준데...”   

    

  아들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나한테 뭐 시킬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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