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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Nov 11. 2020

이 곡을 결혼식 축가 ‘금지곡’으로 지정합니다

진미령이 투하한 눈물 폭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Jekyll & Hyde)에서 의사 지킬은 아버지의 중병을 고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다 다소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고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분리하고픈 욕구에 사로잡힌다.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지킬의 욕망은 현실화되기 직전에 이르고 런던 사교계의 명사들에게 지원을 부탁한다. 하지만 알량한 특권 의식과 보수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던 귀족들은 지킬의 계획을 비웃으며 조롱했고, 결국 지킬은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자신은 이 험난한 길을 가겠노라며 그 유명한 ‘This is the Moment’를 열창한다.

 

 이 작품은 번안되어 국내에서도 여러 번 공연되었고 지킬의 테마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고 개사되어 크게 히트했다. 문제는 이 곡이 당초의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결혼식 축가로 수없이 사용되었다는(!) 것이고,  곡에 관한 자세한 맥락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복에 겨워 있는 신랑과 신부를 보며 당황인지 황당일지 모르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여러 번 있었다.


https://youtu.be/XdiHLeU9-WI

‘지금 이 순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조롱하지만 난 그 길을 가고 말리라~~



반면 제대로 선곡만 된다면 결혼식의 테마는 극강의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당사자와 그 부모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객들마저 제대로 공격해 버리는 ‘강자’도 있다. 이럴 경우 당초에는 신랑(신부) 얼굴이나 보고 뷔페나 먹으러 갔다가 눈물 쏙 빼고 오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체험은 남은 주말을 더 즐겁게 보내고 현실에서 주어진 것들에 더 감사하게 만들기에 언제든 환영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눈물샘에 단순한 공격의 수준을 넘는 ‘테러’를 가하는 곡이 있다면? 별달리 화려한 미사여구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소위 ‘가오’라 불릴만한 특별한 분위기를 잡지도 않지만 가사가 보유한 폭격 능력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간장게장으로 더 유명하신 가수 진미령은 한 여성이 소녀에서 숙녀를 거쳐 어머니가 되어가며 겪는 기쁨과 슬픔, 갈등과 회한을 통해 세상살이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고도 청아하게 노래한다.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그 날’에서 ‘여자가 된 딸을 보내는 순간’까지 노래 속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필수는 아니지만 손수건 및 티슈를 준비하실 것을 ‘적극’ 권합니다


https://youtu.be/la475LttW8I

‘무려 ‘이 곡을 결혼식 축가로 부른 결과 결혼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
아버지는 나에게 꽃을 안겨 주시고
어머니는 같은 여자가 되었다고 너무나 좋아하셔
그때 나는 사랑을 조금은 알게 되고
어느 날 남자친구에게 전화 왔네
어머니는 빨리 받으라고 하시고
아버지는 이유없이 화를 내시며 밖으로 나가셨어
그땐 나는 아버지가 정말 미웠어


‘소녀’에서 ‘숙녀’가 되었다는 느낌에 나는 그저 설레고 기쁠 뿐이다. 아빠, 엄마도 이제 우리 딸 다 컸다며 축하하고 꽃다발을 안긴다. 하지만 마냥 기쁨에 겨워있는 자식과는 달리 부모는 더 큰 세상에 발을 내딛으려는 자식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히고 그런 우려에 자식과 갈등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딸은 괜시리 부모가 미울 뿐이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잘 먹고 잘 산다’. 그저 지금의 젊음과 행복이 영원할 거라고 믿으며~~


내일이면 나는 시집을 간다네
어머니는 왠지 나를 바라보셔
아버지는 경사났다면서 너무나 좋아하셔
그때 나는 철이 없이 웃고만 서 있었네
웨딩마치가 울리고 식장에 들어설 때
내 손 꼭 쥔 아버지 가늘게 떨고 있어
난생 처음 보았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버지 모습
나도 같이 주저앉아 울고 싶었어


알콩달콩한 나의 사랑은 결혼이란 결실을 맺고 이는 온 집안의 경사가 된다. 지금까지도 행복했지만 이제는 더 행복할 것이란 기대에 내 마음은 구름 위를 걷고 하늘을 달린다. 하지만 신부 입장 전 살짝 쳐다본 아버지는 생각과는 달리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일어난 듯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슬프고 울 것만 같다(하지만 결혼식 후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대성통곡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한다).


내일이면 나는 쉰 이라네
딸아이가 벌써 시집을 간다나
우리 엄마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그 옛날 엄마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
자꾸 바라보는 나의 딸아이 모습
그래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란 걸 왜 진작 몰랐을까
그래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란 걸
그래 사랑이란 바로 이런 거야
그래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거란 걸


세월이 흘러 나는 엄마가 되었고 어느덧 내 딸도 결혼한다. 지난 날 나처럼 내 딸도 기쁨에 취해 어쩔 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식을 떠나보낸다는 착잡함과 돌아가신 친정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겹쳐 자꾸 눈물만 난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그 옛날 나의 부모님은 미소 건너편 마음 한 구석에 깊은 슬픔을 감추어 두셨다는 것을.

 마음 속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결혼식장의 샹들리에 아래 찬란히 빛나는 딸을 보며 속으로 되뇌인다. 지난날 삶의 모든 순간이 기적이었고 내 부모가 되어주셔서 감사하고 그  분들의 딸이어서 더 없이 행복했다고. 그걸 지금에야 알게 되어 아쉽고 안타깝지만 남은 삶의 반은 내 곁의 소중함을 챙기며 진정으로 행복하리라 다짐해 본다.








1972년에 그룹 '영사운드'의 멤버로 음악생활을 처음 시직한 진미령은  1975년에  장덕이 작사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으로 데뷔한다(당시 장덕은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재능으로 가요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1979년에 발표한 "하얀 민들레”로 큰 인기를 구가했고 이후 '아하' 같은 댄스곡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개그맨 전유성과 이혼하는 등 아픔을 겪기도 했다(참고로 두 사람은 혼인신고 없이 사실혼 관계만 유지했다). 그러다 여러 가지 개인사로 힘들 무렵 아버지(2009년 작고)를 생각하고 작사한 ‘내가 난생 처음 여자가 되던 날'을 발표하고 이 곡이 히트하며 자신이 여전히 활동 중이란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게 된다.

  진실되고도 애절한 노랫말 덕에 유튜브에 감동과 공감을 표하는 댓글도 넘쳐난다. ‘세상에서 가장 애처로운 노래’, ‘남자가 들어도 슬프다’, ‘뭣도 모르고 결혼식 축가로 정했다가 하객들 울보로 만들었다’, ‘곧 아버지 제사인데 너무 보고 싶다’, ‘노래 한 곡에 인생을 담았다’ 등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각자의 사연을 고백했다. 이 중 보다 절제되고 상징적이며 역설적인 표현으로 찬사를 남긴 한 댓글은 그야말로 진미령과 이 곡에 대한 모든 것을 함축해 보여준다.



진미령님은 참으로 마음이 아주 차가운 사람일지 모른다. 이런 노래를 어찌 저리 담담히 부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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