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가의 꽃 Oct 21. 2021

마지막 벚꽃

나의 풍경 속, 시선의 끝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곁에 계시든 안 계시든, 난 일상 속에서 종종 할머니를 떠올렸고 할머니가 바라보는 창문 밖  풍경은 지금 어떤 풍경일까 내가 바라보고 있는 눈이 시릴 만큼 이 푸른 가을 하늘을 할머니도 보고 계실까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 맑디 맑은 하늘을 보시지 못한 채 보름 가까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시다

며칠 전 새벽,  눈을 감으셨다.


99세의 할머니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예상했었지만 막상 할머니의 죽음이 나에게는 비현실적이었다.


이른 아침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난 평상시처럼 강아지를 산책시킨 후 아침을 먹었고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야

차에 올라 대구를 향했다.

차를 몰고 가던 중에도  허기가 느껴져 휴게소까지 들렀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이 나를 뒤덮을 거라고 늘 막연히 상상했었는데 나는 너무나도 멀쩡했고 이렇게 멀쩡한 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오랜만에 뵙는 친척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벽에 머리를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중간중간 친척들과 농담도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3일을 보냈다.


마지막 화장장에서는 한 줌의 재로 변한 할머니를 마주하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통곡을 했지만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에도 난 그저 한 편의 영화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삼일장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와 난 하루 꼬박을 잠만 잤고 그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강아지를 데리고 집 밖을 나섰다.


며칠 사이에 가을은 이미 저만치 멀리 가버렸고 꽤  쌀쌀한 바람과 코끝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 시선 끝에 벚나무가 들어왔다. 벚나무 아래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그 아래를  한 발짝 한 발짝 걷는데  문득 장례식장에서 고모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올해 봄, 할머니가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시기 전날, 마지막으로  고모께서 휠체어에  할머니를 싣고 동네 근처로 산책을 나가셨다고 한다. 벚꽃이 한창이라  고모가 "엄마 벚꽃 한번 봐봐" 라며 할머니께 말씀드리자

할머니가 아무 말씀 없이 한참을 벚꽃나무를 바라보셨었다고 한다.

고모는 이 이야기를 전해주시며 그날 봤던 벚꽃이 엄마의 마지막 벚꽃이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한참을 흐느끼셨다.


할머니는 알고 계셨다. 그날의 벚꽃이 할머니 인생의 마지막 벚꽃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눈에 담아두시려고 했다는 것을.


난 이미 져버린 벚나무 낙엽을 밟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팡하고 터져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지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를 못 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올해 내가 봤었던 그 황홀했던 벚꽃을 할머니도 보셨었구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내년 벚꽃을 다시 맞이할 때 난 할머니를 어김없이 떠올리겠구나.'


할머니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담긴 벚꽃나무를 상상하며 난 벚나무 아래에서

할머니가 진짜로 내 곁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며칠 동안 알 수 없던 비현실적 감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비로소 이제야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난 가을 하늘 아래서 꺼이꺼이 마지막 울음을 내뱉었다.


내년에 돌아올 벚꽃을 난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풍경 속 끝에 계시던 할머니를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까.


아직 나는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촌스러운 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