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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가의 꽃 Mar 04. 2022

놓아 , 놓아, 놓아 그리고 꽃

놓아주는 법

아주 예전부터 어른들로부터, 책으로 부터 , 그리고 삶의 도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말   

'놓아야 한다, 놓아줘야 해, 놓을 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말의 의미가 나는 언제나 궁금했었다.


놓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말로만, 마음으로만 놓는다고 결정하면 놓아지는 것일까?  다들 놓아라고는 하는데  어떻게 놓아야 할 것인지는 그 누구도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면 그저  차차 알게 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흘러 40대가 코앞에 왔는데, 바로 내년이면, 드디어 2022년에는 내가 그 불혹이라는 마흔이 되는데 그 '놓아'의 방법은 점점 더 미궁에 빠졌고 속절없이 나이만 먹고 있었다.


40살이 되기 전인  작년 2021년  39살,  나는 마흔이 된다는 것이 두렵다기보다는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맞이하기 전에 반드시 그 '놓아'의 방법을 알고 40대를 맞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 나름의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로 결정을 하고 1년 동안 아침 명상과 일기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명상과 깨달음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어 내려갔고 그와 관련된 온갖 영상들을 백색소음처럼 운동을 할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자기 전까지 무한 재생했었다.


나는 나의 두터운 에고를 내려놓고 싶었고  30대 내내  집착해오던 꽃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욕망들을  내려놓고 싶었다.


많은 명상 방법들이 있었지만  내공이 부족해서일까 그 순간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가 도 내일이 되면 다시 마음속의 수많은 에고들이 나를 휘젓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그 여러 명상법들은 분명 나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은 될듯하다 또 어지럽혀지기를 반복하는 내 마음이 야속하기만 했었다.

숨바꼭질과도 같았던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꽃을 통해 잠시나마 행복하기도 했었고 또 그 꽃으로 인해 많은 밤을 뒤척이고  좌절감으로 고통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래 내가 놓아주자 놓아주는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앞으로 꽃을 안 하면 되겠지, 더 이상 쳐다도 안 보겠다고 마음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라며 들어주는 대상도 없는 화풀이를 그렇게 해댔었다.

하지만 그렇게 놓아주는 것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왔었고 그런 '놓음'은 더 무섭고 강한 집착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나 더 이상 꼴도 보지 않겠다는 결심과 동시에 더 큰 원망이 온갖 방향으로 불특정 다수의 것들을 향해 찌르고 있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평정심을 찾는 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작년 가을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슬픔과 그리움과는 또 다른 별개의 감정이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며칠 뒤, 벚꽃나무의 낙엽이 두껍게 쌓인 산책로를 걷다 갑자기 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울컥 터져 나오던 그날, 나는 내가 지금 할머니를 놓아드리는 과정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 괜찮았던 감정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할머니가 곁에 없는 앞으로의 내 삶도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기에 나는 붙잡지 않고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놓는다는 것은  괜찮다는 것이었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주어도 내 삶은 괜찮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대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놓아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가 떠나시면서  40살을 앞둔 손녀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은 메시지였다.


꽃을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면,

꽃을 향한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 모두 인정한다면,

 일의 성공과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자유롭게 놓아줄  있을 것이다.


이젠 놓아주는 법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놓아주는 것은 대상을 향한 감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놓아주기 위해서는 그전에 받아들여야 한다.

행복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다 괜찮다고 받아들일 때

놓아주어도 괜찮아지는 것이었다.


40살에 막 접어든 나는 요즘 늘 되뇐다.


'내가 꽃을 계속하더라도, 이로 인해 실패를 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꽃을 하지 않더라도 내 삶은 그것대로도 괜찮다.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괜찮을 것이다.'


봄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꽃은 다시 그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꽃은 자신이 지는 법을 받아들였었기에 내려놓을 수 있었고 내려놓았기에 또다시 피어오르는 지금 이 순간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계절이 지나면 가뿐히 내려놓으며 나는 괜찮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잘 해내고 싶었기에 역으로 놓아버리고 싶던 '꽃'을 향한 나의 감정이 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꽃이 있는 삶이든 없는 삶이든 괜찮아질 수 있도록  나는 이제 놓아주는 법이 아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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