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수 없는, 그러나 피어나는

꽃무릇, 만날 수 없는 사랑의 붉은 흔적

by 보라
짧은 계절의 문턱에서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
만날 수 없어 더욱 애틋한 사랑의 전설을 따라 걷다.



산에 다니고 자연을 찾기 시작하면서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는 재미 또한 깊어졌다.


이른 봄, 은은한 향기를 품은 매화를 시작으로

노오란 산수유와 화사한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4월이면, 두덕두덕 팝콘처럼 터지는 벚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벚꽃이 진 자리에

연분홍빛 철쭉과 고혹적인 장미가

제 순서를 기다리듯 피어오르고,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견디고 나면

가을의 문턱에서 또 다른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소담한 메밀꽃이 달빛 아래 유혹을 걸고,

코스모스와 국화는

꽃의 여왕 자리를 놓고 다투는 듯하다.


그리고,

이 계절의 문턱에 피는 또 하나의 꽃.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꽃무릇이 있다.


꽃과 잎이 서로 다른 시기에 피기 때문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만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꽃무릇은 주로 사찰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데,

그중 고창 선운사는 꽃무릇의 대표적인 군락지다.


짧아지는 해와 더뎌지는 아침 속,

선운산을 향하는 버스의 창문엔 푸른 기가 스며 있고,

오랜만에 만난 산행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가을바람을 실은 버스는 그렇게 선운산을 향해 달렸다.


도착하자 이미 곳곳이 사람들로 붐볐다.

산악회 단체, 가족 나들이객들.


서로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단 하나의 기대를 품고 일주문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서 만날 붉은 꽃무릇,

여인의 속눈썹 같은 섬세한 곡선.





군락지에 이르자,

붉은 물결이 발아래까지 번졌다.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슬픈 전설을 떠올리며 붉은 물결을 잠시 뒤로한 채

선운사 담장을 따라 숲길로 접어들었다.


석상암을 지나 마이재와 수리봉으로 향하는 길,

넓고 부드러운 흙길은 어느 순간

서서히 경사를 높이며 산길로 이어졌다.


때로는 질척이고,

때로는 바람이 불어와

숨을 고르게 하는 길이었다.





수리봉을 지나 천마봉에 닿았을 때,

구름이 드리운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은

짧은 여정에도 하루를 풍요롭게 채워주었다.


해발 336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선운산은 산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담고 있다.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

겹겹이 쌓여 선 기암괴석,

저 멀리 번져가는 산빛,

적당히 흘리는 땀방울,


그리고

애틋한 전설을 품은

꽃 한 송이까지.


꽃무릇은

9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아주 짧은 시간 머물다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바라보는 시선도,

다가가는 감정도

다른 꽃들과는 사뭇 다르다.


'만나지 못하는 꽃'이라는 슬픈 운명을 안고서도

그토록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


산을 오르고,

산이 마련한 풍경 앞에서 감탄하고,

꽃 한 송이를 오래 바라보는 일.


이 모든 것이 모여

우리의 하루를,

삶을,

그리고 계절을 만들어간다.


짧은 9월의 햇살과 바람 속,

마음이 기억하는 계절을 하나 더 간직했다.







꽃무릇

-이룰 수 없는 사랑-


꽃과 잎이 함께하는 게

세상의 정한 이치이거늘,

어찌 너와 나는 만나지 못한단 말이냐.


스미는 햇살이 스러져 간 네 소식을 전하고,

지나는 바람이 훗날 내 이야기를 실어 나르겠지만,


다른 시간을 달리는 우리는

결국 만날 수 없는 운명인가.


빨갛게 불탄 너의 자태는 그리움이어라.

그 모습 달래려 세상에 내려오지만,


이미 너는,

가고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