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향기

by 보라
사랑의 투명한 슬픔과 향기로운 기억


조금 전, 트레일에서 운동을 하던 중

남자분이 제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비누 향 같은 은은한 향기가

가늘고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비누 향을 닮은 향수를 뿌린 듯했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저기요, 지금 뿌리신 향수 이름이 뭐예요?"


그만큼 참 좋은 향기였지요.


후각은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오래 기억을 간직한다고 하지요.

그 향기를 따라 걷는 사이,

기억 속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입시 학원 수학 단과반을 다니던 시절.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맑고 뽀얀 피부,

금테 안경을 반듯하게 쓴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교복도, 책가방도, 신발도

어쩐지 모범생처럼 느껴지던 아이.


그를 처음 본 날 이후,

학원에 가는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단정한 교복 자락,

수업 중 고개를 끄덕이는 진지한 뒷모습,

가끔 강의실을 휘도는 눈빛까지도.


하지만 제 마음은

친구에게만 조심스레 전해질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어느 날, 노트를 꺼냈는데

볼펜이 없었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에게 빌리려는 순간,

그 친구가 대각선 너머에 앉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저기요, 죄송한데 볼펜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네, 여기요."


그리고 친구가 제 어깨를 툭 치며 받으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저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감추지 못한 채

급히 팔을 뻗어 말했습니다.


".. 고맙습니다. 쓰고 드릴게요."


손에 펜이 닿는 순간,

비누 향이 은은히 번졌습니다.

아마 금방 손을 씻고 온 모양이었겠지요.

그날의 수업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직 손 안의 펜과 향기만 또렷했을 뿐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가 자꾸 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혹시... 나를 좋아하나?'

혼자만의 착각은 설렘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며칠 뒤, 친구에게서 들은 소식이

제 가슴을 툭 내려앉게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라본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친구였고,

결국 둘이 사귀게 되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수강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 한 번 건네지 못한 후회,

착각과 자만심,

그 모든 감정은 수치심으로 번져

저를 학원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첫 짝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습니다.


아팠던 마음을 달래려

'락웰의 Knife'를 반복해 들었습니다.

그 노래는 마치 칼로 살을 에는 듯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창밖 세상을 둥글고 투명한 유리알처럼 빛나게 했습니다.


비록 아픈 기억이었지만

그가 남긴 비누 향만큼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향기를 맡을 때마다

그날의 떨림과 아릿함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접어

마음 한편에 고이 넣어둡니다.






누군가를 닮은 짝사랑의 비누 향이 아니라,

무언가를 씻어내기 위한 슬픈 비누 향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되는 첫사랑처럼

달콤하고,

상처 위를 정갈히 닦아주는

고결한 비누 향.


오늘 하루,

그런 향기를 품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