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by 보라

겨울만 되면

몸도 마음도 무겁다.


의욕은 사라지고,

만사가 귀찮아지고,

문득 게으름에 빠진 내 꼴을 알아챘을 때면

애써 합리화하는 비겁한 모습과 마주한다.


그래서 겨울의 나는,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따뜻한 이불속에 둥지를 트는 날이 이어진다.


하지만 마냥 곰일 수만은 없다.

겨울이라면 지긋지긋해하는 내가

그래도 용기를 내 꼭 가고 싶던 눈꽃 산이 있었으니,

바로 한라산과 선자령이다.


내게 한라산은 큰맘 먹고 가야 하는 큰 산,

선자령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작은 산이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

두 산을 마주했다.


한라산은 따스한 햇살 속에 상고대를 빛내며

온화한 기운을 내어주었고,

선자령은 표독스러운 바람만을 퍼부었다.


눈부신 상고대는 자연의 신비를,

얼어붙은 눈꽃은 경이로움을 주었지만,

휘몰아치는 바람개비 소리와

동해까지 날려버릴 듯한 매서운 바람은

자연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었다.





겨울 선자령은 온통 하얀 분칠을 한 듯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눈의 노래,

등산화로 전해지는 폭신한 감촉,

생크림을 얹은 듯한 초록 소나무...

모두 집에 가져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등산로에서 마주친 이들은

풍경을 ‘환희’, ‘환상’이라며 들떠 있었지만,

정작 나는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


한라산에서 다친 무릎이 다시 말썽을 부렸고,

눈물과 비명을 쥐어짜 낸 통증,

얼굴을 찢는 칼바람,

손가락 끝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끝내 나를 짓눌렀다.


그렇게 겨울의 선자령은

아름다움 속에 숨은 고통이었고,

내 부족함을 깨닫게 한,

넘어야 할 큰 산으로 남았다.


언젠가 다시 선자령에 서서,

고통이 아닌 기쁨으로

겨울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