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수학을 포기하면 인생이 편해져요
20대가 되고 몇 년이 지난 뒤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중학교 때 쓰던 일기를 발견한 적이 있다. 알록달록한 스티커가 빼곡히 붙어있던 수첩이었는데, 작은 종이수첩에 이리도 열심이었던 내가 결국 집에 굴러다니는 펜 하나만 들고 다니는 어른이 되다니 슬퍼지던 참에 한 페이지에서 웃긴 글귀를 발견했다. 그대로 옮기면 앞으로의 삶에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순 없지만 대충 열다섯의 내가 동물원에 갇힌 얼룩말 같다는 한탄 섞인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난 그 상황이 정확히 기억난다. 나는 수학학원에서 이해도 안 되는 경시대회 문제를 풀고 있었고, 하필이면 이른 나이부터 수포자였던 나의 친한 친구가 영재였던 바람에 한껏 좌절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얼룩말은 나고, 얼룩말은 수학 문제를 풀기 싫었던 거다. “수학 문제 풀기 싫다” 이 간단한 말 한 마디면 될 걸 잘못 없는 얼룩말을 동원하다니 참 거창하게도 좌절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작년 한국에 갔을 때 또 서랍에서 대학생 때 사귀던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쓴 일기를 발견했다. 이 쯤 되면 연말마다 그 해에 쓴 일기는 전국민이 다 같이 태워버리는 분서 행사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그 일기는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지겹게도 살아남은 덕에 읽혀진다. 열다섯의 얼룩말은 열 살을 더 먹은 뒤엔 눈물로 밤을 지새웠더란다. 일기에 따르면 얼룩말은 거창한 연애를 했었다.
과거의 얼룩말들이 쓴 일기를 읽어보면 나름의 패턴이 보인다. 열다섯의 얼룩말과 스물다섯의 얼룩말, 그리고 여러 순간들의 얼룩말들은 일기가 쓰여진 그 순간에 진심을 다해 처음으로 느낀 감정들을 생경하게 기록했겠으나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결국 같은 지점에서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단걸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내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앞으로 닥칠 불행에 발이 걸려 넘어지더라도 오래 머무르지 말자는 생각.
나는 태어나기를 무얼 해도 사무치게 행복할 수 없도록 태어났고, 가끔은 악랄하리만큼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뜬 눈으로 밤을 새우도록 지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좇아 살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불행을 건너뛰기 위해 애쓴다.
행복주의자들에게 이건 꽤나 비관적으로 들리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주 행복하기를 애쓰지 않겠다는 다짐은 불행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조금만 행복해도 행복인 줄 알겠다는 기꺼운 타협이다. 서른살이 된 얼룩말이 스물 다섯 얼룩말, 열다섯의 얼룩말 시절을 회상하며 떠올리는 것이 눈부신 추억은 못 될 지언정 안도감 정도라 한대도 만족하며 살련다. 삶은 언제나 그다지 녹록치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나의 안도감과 인내는 수학 문제가 풀기 싫었던 열다섯 얼룩말, 애인과 헤어지고 눈물을 훔치는 얼룩말이 사실은 같은 깊이로 절망했다는 걸 깨닫는 데서 온다. 사무치게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면 절망의 깊이를 가늠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