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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Aug 24. 2021

누구나 안정을 꿈꾸지만, 안정만을 꿈꾸지는 않는다.

제주도시여자의 첫 찐 바다

나는 여름이 싫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태어난 계절을 가장 좋아하고 즐긴다는데 나는 유독 여름이 싫었다.

내내 비 오는 장마,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 잠깐만 나가도 땀이 줄줄 흐르고, 재미를 느껴볼 새 없이 관광객들로 붐비는 제주의 여름은 나에게 가장 힘든 계절.

 이 좋은 제주에서 살면서 제주를  즐길 줄 모르는 제주토박이. 그리고 선천적으로 호흡기가 약한 아이들 덕에 제주의 여름은 더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보니 나는 늘 "자연에서 느끼는 계절의 변화를 즐기며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변화가 필요했다. 나도 계절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이제껏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 바다에 다녀오면 아이들이 아플 것 같다는 걱정, 바다 물놀이 후 뒤처리하는 게 귀찮아서 라는 등 재미없는 핑계를 대며 제대로 된 바다 물놀이는 한번 해보지도 못하다가 올해는 꼭 바다에 자주 가리라, 아이들에게 제주의 바다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리라 마음먹고 서핑보드를 주문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말이 왔고, 서핑보드도 왔다.

오늘만 기다린 오니는 바다에 가고 싶고, 집돌이 비니는 집에만 있고 싶단다. 애은 이럴 때 정말 힘들다.

결국 우리가 내린 최선의 선택. 비니랑 아빠는 집에서 쉬고  오니랑 나만 밖으로 나왔다.

혼자서 오니랑 바다 물놀이는 처음이었고,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서건도에 가서 서핑보드 사진이나 좀 찍고 잠깐 놀다 오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바닷물이 너무 차가웠고, 돌밭에서 서핑보드는 개그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에 오려던 찰나, 동네언니의 도움으로 30분이라도 꼭 바다놀이를 시켜주겠다며 색달해변으로 달려갔다.

그 시간 오후 6시 10분. 해가지기 직전. 진짜 열심히 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중문색달해변에 도착했다.

해수욕장 초입부터 바다내음, 파도소리가 나를 들뜨게 했다. 늘 가슴 한편에 숨은 흥을 억누르며 사는데, 이런 분위기에선 나도 모르게 흥이 터진다. 역시나 서퍼들의 천국.


그런데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파도. 와, 태어나서 이렇게 큰 파도는 처음이었다.

태풍이 아니고서야 이런 큰 파도를 직접적으로 접할 일도 없었고, 이런 날엔 바다에 오지 않는 게 도민의 정석.

_사실 내가 아는 제주도민은 바다 물놀이를 즐기지 않는다. 쾌적한 수영장을 두고 왜 모래 가득 묻히며 짠내 나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느냐며 바다는 드라이브코스로만 넣어두는 도민들.

특히 중문색달해변은 서퍼들이 좋아할 만큼 파도가 세고 골이 있어 매년 인명사고가 나는 해수욕장이라 도민들은 잘 찾지 않는 곳이다._


동네언니와 만나서 내가 건넨 첫마디는 "언니, 저 바다 봤으니 이제 갈게요. 도민은 이런 파도에 바다 안 와요. 죽어요 진짜!!!"였다.

나에게는 정말 생애 최고 높이의 파도였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무서운 파도 높이. 모든 걸 집어삼켜버릴 듯한 무서운 파도였다.

그래서 모래놀이조차 엄두가 안 났는데, 아이들은 이미 모래밭에서 폐목을 가져다가 집을 짓기 시작했다.

오니는 정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신이 나서 모래밭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

그리고 친구 아빠의 도움을 받아 파도타기에 도전했다.

겁이 나서 바다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던 오니가 친구들과 같이 파도를 온몸으로 느끼는 걸 보며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평소처럼 우리 가족끼리만 갔다면 발도 안 넣어보고 나올 게 분명한 바다. 바다 물놀이 선택지에서조차 빠져있던 중문색달해변에서 이런 높은 파도에서 파도타기를 하다니. 이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그동안 정말 내가 너무 즐기지 못하며 살았구나.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았구나. 정말 바보처럼 살았구나.

남들은 이 좋은 제주 이렇게 좋은 여름을 잘 즐기며 살았을 텐데. 조금 덥고 쫌 까맣게 타면 어때.

나 그동안 너무 틀 안에 가두고 살면서 내 아이들도 그렇게 키웠구나 싶었다.

나의 좁고 낮았던 한계치를 한 단계 높여준 동네언니와 형부에게 정말 고마웠다.


누구나 안정을 꿈꾸지만 안정만을 꿈꾸진 않는다.

나의 인생은 대체로 평탄했고. 그 평탄한 삶이 내게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 나의 삶이 단조롭고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늘 모험하듯 다이내믹한 삶을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이렇게 일탈 아닌 일탈, 모험, 변화를 추구해도 좋은데 나는 그저  그 가끔이 어려웠던 거다.


역시, 부모의 삶의 역사, 패턴, 경험치로 정해진 부모의 한계가 아이들의 인생을 좌우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부유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과 사랑을 주고 싶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이라는 말에 얽매여 한계를 정해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정말 더욱더 혼자서는 불가능한 많은 것들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고 경험하며 조금씩 한계를 넓혀주고 싶다.

나의 한계를 깨뜨려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건네는 '괜찮다'는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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