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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Dec 09. 2021

물음표와 느낌표



지난달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글쓰기 모임의 소모임으로 시작해서 각자 읽고 싶지만 혼자서는 읽기 힘든 책을 선정해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첫 책으로 무얼 고를까 고민하다가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선정됐다.

김영하의 북클럽 선정도서로 알게 되어 지난여름부터 읽고 싶어 구매는 해놓았는데 참 읽는 속도가 안 붙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책장에 꽂혀버린 책이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받는 순간 페이지수에 압도되어 외면해왔는데 이젠 더 이상 외면하고 싶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3주라는 여유 있는(시작할 때 3주쯤이면 정말 쉽게 읽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읽어가기로 했다.

마감기한이 있는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이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과 안도감이 함께 밀려온다. 과정은 힘들어도 끝이란 게 있으니까.


들뜬마음으로 책을 펼쳤더니 기대했던 만큼 도입부가 정말 재밌다.

내가 그간 고민했던 많은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주기도 하고 새로운 고민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읽는 내내 너무 흥미로웠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한 장을 넘기면 앞장이 백지화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세상에.

철학은 진짜 알 수 없는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나름 대학시절 교양으로 철학수업도 들었는데 이토록 내 뇌가 철학으로부터 깨끗할 줄이야^^


그래도 읽으면서 작은 느낌표라도 있어야 진도가 나갈 텐데 자꾸만 물음표가 쌓여 진도가 안 나간다.

다들 그냥 훑어라도 읽으라는데 나는 그 훑는 게 안됐다.

진작에 속독이라도 배워둘걸 꼭 이럴 때만 정직함이 솟아나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읽고 모르면 다시 읽고 또 읽고 밑줄을 긋다 보니 밑줄은 한가득인데 내 머릿속은 점점 더 텅 비어갔다.

한 권을 다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모든 게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릴 것 같아 읽으면서 자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아, 내가 진짜 난독증인가 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멍할 것 같아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고 자꾸만 머릿속에 딴생각이 쳐들어온다.



결혼과 동시에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했던 터라 기승전엄마로 살아낸 5년의 시간을 보내고, 코로나를 계기로 다시 시작 나만의 공부를 하면서 내게 가장 타는 목마름으로 다가온 건 철학이었다.

코로나 관련 이슈를 기점으로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나의 진짜 공부.

누가 시켜서, 남들이 하니까 하는 공부 말고, 내가 진짜 궁금하고 관심 있어서 찾아보고 뜯어보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하는 진짜 공부의 시작과 끝에는 늘 철학이 있었다.

도대체 너는 무엇이길래 언급되지 않은 게 없고, 봐도 봐도 모르겠어서 내게 이런 궁금증을 가져다주는 걸까.

그래서 늘 궁금했고,  늘 알고 싶었고, 늘 느끼고 깨닫고 싶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를 굳이 찾자면, 나는 그저 나와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삶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을 미리 좀 깨닫고 싶어서? 랄까.


사실 공부가 제일 어려웠던 내게 타의가 아닌 자의로 하는 공부가 시작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공부 따위 하지 않고 맘 편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아빠는 공부하는 나를 보며 학교 다닐 때나 열심히 하지 뭣하러 이제 와서 고생하냐며 놀리시는데 진짜 이렇게 평생 공부해야 되는 줄 알았다면 미리 조금 더 탄탄히 기본을 쌓아둘걸 하는 생각이 절로든다.

그래도 하나에 꽂히면 또 열정을 뿜어내는 보램비답게 한동안 철학에 좀 빠져 살아봐야지.


그러다 어제는 책도 다 읽지 않았는데 우연히 찾은 서양철학사(마르크스) 강의를 들었다.

책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강의를 들으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도 하고 또 더 헷갈리기도 했다.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기도 하고 느낌표가 다시 물음표가 되는 진기한 경험.

이런 게 공부의 재미라는 거였나, 왜 어릴 땐 이걸 몰랐을까. 너무 재밌고 신기하다.


철학(哲學)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흔히 인식, 존재, 가치의 세 기준에 따라 하위 분야를 나눌 수 있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그동안 나는 철학이 되게 어렵고 힘든 거라 생각했는데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의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건 제쳐두고, 경험에서 얻은 나의 철학은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생기는 거겠구나.

아 이래서 모든 사람은 철학자라고 하는구나.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나의 철학이 달라지겠구나, 나의 철학에 따라 사는 게 달라지겠구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한다.

이래서 사람들이 철학을 좋아하는구나!!!

물음표와 느낌표가 앞다투어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궁금하고 재밌는 것들이 튀어나온다.

매일 이렇게 새롭고 재밌는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철학이 참 반갑다.

앞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나의 철학적 지식이 철학적 사고가 기대된다.


아무것도 모르다가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가장 신나고 가장 위험한 나.

"진정해 보래미!!! 와리지말자!!! (서두르지말자의 제주도 방언)" 라며 나 스스로에게 페이스 조절을 권한다.

오버하지 말고 차분하게, 그저 지금의 이 들뜸과 열정으로 물음표와 느낌표의 지난한 경주를 응원하며, 오늘도 나는 나만의 철학을 쌓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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