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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유난히 공기질이 나빴다.
개학하고 2주간 바뀐 루틴에 적응하느라 지쳐버린 아이들과 나의 컨디션에도 이상신호가 감지됐다.
내 발바닥에서 한동안 잠잠했던 한포진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이들이 자꾸만 단것을 찾고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았다.
방학 동안 너무 풀어져 있다가 개학하니 너무 힘들었나? 미세먼지 때문인가? 했지만,
사실 그냥 어떤 핑계로라도 그저 쉬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 미세먼지도 최악인데 그냥 집에서 쉬자’ 싶어 저녁일정을 취소하고 평소보다 일찍 귀가해 오랜만에 집에서 한가로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할 게 없으니 심심하다면서도 심심해도 집에 있으니 좋다는 아이들의 반응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스케줄 조정이 좀 필요하겠다. 아이들에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 줘야겠다 다짐했다.
여유롭게 저녁을 먹고 주방마감을 하는 동안 편안함과 동시에 찾아든 아들의 졸음.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니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최근 앞니 레진이 떨어져 나가며 앞니 충치가 심해지고 있는 아들의 양치질을 꼭 시키고 재워야 했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을 깨워 욕실로 들여보내고 수건 가지러 돌아서는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아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칫솔을 꺼내려고 발받침대에 올라갔다가 돌아서며 턱을 찧으며 넘어진 아들이 보였다.
잠시지만 별일 아니라 생각했고 바로 안아 밖으로 나오며 다친 곳을 살피는데 턱에 피멍이 들었다.
생각보다 심한 상처에 놀랐는데 아들이 갑자기 귀가 아프다며 더 크게 울었다.
뭔가 잘못됨을 짐작하고 병원에 가자며 아들을 달래는데 귓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를 본 순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우는 아들의 말에 급히 119에 신고하고 기다리는 동안 친정엄마와 남편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119가 도착하고 응급실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양치 그거 뭐라고 하루쯤 안 하고 자도 될 것을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아들을 다그쳤나,
충치 때문에 양치를 꼭 해야 했으면 욕실 말고 밖에서 눕혀서라도 시킬걸 왜 욕실로 들여보냈을까.
미세먼지 그거 뭐라고 그냥 저녁일정대로 움직였으면 안 다쳤을 텐데.
수건이라도 미리 챙겨놨으면 안 다쳤을 텐데.
밖에서 뭐 하다 다친 것도 아니고, 집에서 고작 양치시키려다 애가 다치다니,
귀가 안 들린다는데 청각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겠지,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가.
턱으로 떨어졌는데 왜 갑자기 귓속에서 피가 나지. 애가 나를 알아보긴 하는데 그럼 괜찮은 건가.
안 괜찮으면 어떡하지? 나 어떻게 해야 하지?
남편은 아직 퇴근하는 중이고, 딸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없어 친정엄마께 부탁했는데, 놀라서 울던 딸은 괜찮을까.
구조대원은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어느 병원 응급실에 갈지 결정하라는데 내가 결정해도 되는 건가?
나는 1시간이 걸려도 대학병원에 가고 싶은데, 119 구조대는 시간이 급한 상황일 수 있어서 동네 의료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고, 남편은 그래도 제대병원이 낫지 않겠냐는데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수많은 걱정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손발이 달달 떨리고, 머리가 멍해지는 통에 영혼마저 탈탈 털리는 것 같았다.
아.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 주세요. 이건 꿈이라고 말해주세요.
그사이 우리는 의료원응급실에 도착해 시티촬영과 간단한 검사를 마쳤다.
당장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지만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경과를 지켜봐야 하며, 귓속에서 나는 피는 고막이 찢어져 그런 것 같다며 다음날 외래진료를 예약하고 귀가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오니 남편과 양가부모님이 도착했다.
그리고 남편과 부모님들을 뵙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모두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아이들 키우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고,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말해주셨지만,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그저 내 잘못.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사랑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내 아이.
그런 아이를 위해 나는 정말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이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너무너무 무서웠다.
귓속 출혈이 멈춘 것도 아니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아들의 말에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우리는 의료원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또 한 시간을 달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다시 검사를 하고 당직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진찰과 처치를 받고 청각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귀가했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 주세요!!!
그 후로 딱 일주일.
다행히 그사이 아이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고, 며칠 전 확인 차 방문했던 외래진료에서 청력기능도 정상이니 큰 걱정을 덜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안정을 찾은 지 하루 만에 딸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걸을 수 없다며 울어서 병원에 갔더니, 발목에 염증이 생겨 반깁스를 열흘정도 해야 한다고 했다.
허허허... 그저 헛웃음이 나는 3월이다.
3월이 아직 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당황스러운 사건사고가 겹치니, 어디라도 가서 도움을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 일은 모두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머리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는 말인데, 이게 참 제대로 와닿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 고비만 잘 넘으면 다시 안정을 되찾고 웃으며 오늘을 회상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다 지나간다. 너무 애쓰지 말고, 너무 애달프지 말자.
그냥 진짜 제발 좀 대충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