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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Sep 27. 2020

돈도 안 되는 일이 꼴 보기도 싫을 때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늦은 밤, 급하게 가스불을 껐다. 아참, 나 라면 끓이고 있었지. 식탁에 앉아 한강이 된 라면 국물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그동안 끓여 먹은 라면이 얼만데 물 조절에 실패하니. 툴툴거리며 퉁퉁 불은 면을 건져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녁까지 굶고... 짜증이 밀려왔다. 싱거운 국물을 그릇째 들이키며 생각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을 시작해가지고....’


사실 나는 돈 안 되는 일을 여럿 하고 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 귀한 내 시간을 써 가며 이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에 시간과 돈을 쏟는 것이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방전되니까 오늘은 일의 가치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일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만 곱씹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라면을 끓였으니 맛대가리가 있을 리 없었다.

돈 안 되는 일 중의 하나는 책 편집 일이다. 순전히 좋아서 시작한 일.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부쩍 이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되면서 아예 지금은 일이 아니라 짐이 돼버린 기분이다. 지난 몇 주간 단물 빠진 껌을 씹는 사람처럼 아무런 감흥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했다. 쉬지 않고 글을 읽었지만 활자가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끝으로 전달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었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고쳤다.


단물 빠진 껌처럼 맛없는 게 어딨다고. 껌이라면 퉤! 하고 시원하게 뱉어버리면 그만이련만 맡겨진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껌을 뱉듯 속 시원하지도 않고 간단치도 않을 것이다.


연애와 결혼을 견주어본다면 상대를 바라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끝이 닿기만 해도 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이 연애다. 그러나 결혼해서도 같은 증상이라면 반드시 심장병이나 관절염을 의심해봐야 한다. 연예가 떨림이라면 결혼은 익숙함이다. 문제는, 익숙함에서 그치지 않고 감정이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익숙하다’에서 지루하다’로, ‘지루하다’에서 싫증 난다’로. 너 정말 ‘싫증 난다’는 급기야 ‘짜증 난다’가 되었다가 마침내 (나는 네가 정말)‘꼴 보기 싫다’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일이라고 왜 다를까. 매일 새롭고 흥분되고 짜릿한 일이란 건 없다. 이미 ‘꼴 보기 싫다’의 단계로 넘어온 상황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놈의 일, 확 그냥 때려치워 버릴까?’ 고민하게 된다. 물질적 보상이 아예 없거나 적은 일이라면 그 단계는 좀 더 빨리 찾아온다.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어떤 의식 같은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의식. 수시로 내 얼굴에 트림을 해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순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가끔씩 남편과 왜 결혼하기로 결심했던가 그때의 나로 돌아가 본다.(아무리 돌아가려 해도 전혀 돌아가지지 않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수시로 코를 후벼 파는 나를 볼 때 남편도 비슷할 것이다.


일하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이런 의식이 유용할지 모르겠다. 웃긴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에서 쓰는 전문용어로 ‘첫사랑을 회복한다’는 말이 있다. 표현만 빌려다 보자면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에게 이만큼 절실한 말도 없다. 물론 ‘첫사랑의 회복’에서의 사랑이 ‘처음 해 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할 때 그 '처음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첫’의 임팩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일이 싫증 나려 할 때 미리미리 떠올려보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때의 설렘은 어땠는지. 보상이 시원찮아도 덥석 일을 맡게된 이유, 그 처음의 흥분과 끌림을.


아... 오늘은 나에게 그런 의식이 필요한 날이다. 맛 없다면서도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양은냄비를 개수대에 던져 넣었다. 책상에 앉아 ‘돈 안 되는 일’과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를 떠올려 본다.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었던 때, 안 먹어도 배부를 것만 같던 그때, 설렘에 잠 못 이루던 그때를 말이다. 그리고 주문을 외워본다. 일이 정말 재밌다.... 재밌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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