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오줌 싼 이불과 나의 브라가 뒤엉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앉아 한숨을 쉰다. 옆에선 낯선 남자가 자신의 팬티와 운동복을 착착 개고 있다. 살을 섞지 않고서도 서로의 팬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나, 공공 세탁소의 유익은 겨우 그 정도다. 가정용 세탁기에 비해 센 성능, 각기 다른 세제에서 풍겨 나오는 복잡한 향기도 가끔이라면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러나 집에 세탁기가 없어 여길 찾는 거라면. 산타 봇다리 같은 빨래 더미를 이고 지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여길 와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낸 월세 2300달러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세탁기의 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마치 바지 주머니에 지폐를 넣고 세탁기를 돌려버린 사람처럼.
우리는 매달 밑 빠진 독에 돈 붓기를 하고 있다. 퍼 붓기는 하는데 좀처럼 차 오르지 않는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그럴 것이다. 독에 고인 물 맛이 조금이라도 달다면, 그나마 리필할 의지가 솟아오를지 모른다. 비싼 가격 대비 성능이 좋지 않은 집들이 뉴욕의 집들이다. 월세로 산다면 세탁기가 없거나, 세탁기의 설치가 허용되지 않는 집들이 태반이다. 지어진 지 100년이 훌쩍 넘은지라 방음이 안 되고 아무리 쓸고 닦아도 티가 안 난다. 그런저런 문제를 참아가며 4년을 넘게 살았으니까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여기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러나 호불호는 개인의 취향이라서 아무리 적극적으로 싫은 이유를 대봤자 ‘그게 어때서?’라고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뉴욕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흡족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 곳에 이사 온 이후로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난 언젠가 여길 뜬다. 내가 여기 언제까지 살 것 같아? 곧 뜬다, 떠!”가 실현되는 순간을. 그런데.
뉴저지로의 이사. 겨우 월세 계약인데도 막판에 계약이 틀어져 다른 집을 알아보고 있다. 우리의 신상을 탈탈 턴 뒤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온 한 첫 번째 집주인은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청소만 제대로 안 해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겠다, 청소를 하고 나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청소비 50만 원(한국돈 기준)을 내고 나가라. 뭐라도 문제가 생길 시에는 우리가 쓰는 모든 변호사 비용은 너희가 감당해라. 가장 심각한 조항은 ‘집주인이 주기적으로 집을 방문할 수 있다’였다. 계약서에 방문 시간대를 특정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아무 때나 드나들겠단 얘기나 다름없다. 보통의 계약서라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시 방문할 수 있고, 방문 전 미리 연락을 주고, 타당한 시간대에 올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수정을 요구했지만 수정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했다.
바이러스 탓에 복잡한 맨해튼이나 퀸즈를 떠나 뉴저지로 이사하려는 사람이 늘었다. 집값이 죽죽 오르고 그나마 매물도, 렌트도 많지 않다. 괜찮은 집이 나왔다 치면 며칠 만에 나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반면 집주인들은 세입자의 신상을 더욱 철저히 살피고 있다. 친구가 얼마 전 집을 보러 갔다가 이전 세입자가 세간살이며 애들 장난감들을 아무렇게나 놓고 간 것을 보았다고 한다. “야반도주했구먼!” 한국인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이 아니었다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집주인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상식을 벗어나는 계약은 갑질 밖에는 안된다.
집을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월세집 하나 들어가겠다는 건데 집 구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나, 과연 여기를 뜰 수 있을까? 에이씨, 빨래나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