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무소유의 정신이 우세할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으니 손해 볼 것도 없다는 마음가짐. 집에 대한 생각도 ‘집이 없으니까 가볍다’로 정리가 된다. 남들이야 집을 두 채 가지든 세 채 가지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장된 정신을 야금야금 해제시키는 게 있으니 바로 서러움의 감정이다. 마음 한쪽에 고이 접어두는 설움은 대게 남들이 찾아내 펼쳐진다. ‘집 없는 가벼움’이란 놈은 생각보다 쫄보라 ‘집 없는 서러움’과 붙으면 백전백패다. 그리하여 서러움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나는 도 닦는 인간에서 세상 찌질한 인간으로 급변하고 만다.
미국에서 월세 사는 사람과 한국에서 월세 사는 사람의 설움에는 분명 정도의 차이가 있을 거다. 그래도 ‘설움’이라는 코드는 세계 공용이니까 공감에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믿는다.
집값이 비싸도 비싸도 이렇게 비쌀 수 없는 뉴욕에는 희한한 형태의 집들이 있다. 겉 보기엔 한 가구 주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하에, 1층에, 2층에 각기 다른 세대들이 살고 있다. 타주로부터 이사 왔을 때 이 점은 정말 충격이었다. 다 집값이 비싸니까 생긴 구조들이다. 처음부터 다세대를 위한 건축이 아니었으니 애매한 출입구, 방음, 냉난방 조절, 세탁 시설, 미친 집주인과의 동거 등의 문제가 있다.
차라리 수십 가구가 한 동에 사는 한국 개념의 아파트라면 다수의 동지들과 연대할 수 있으니 맘이라도 편할 것 같다. 그러나 남의 집 2층에 세 들어 살면, 게다가 아랫집 사람이 주인이고, 살금살금 걷는 법을 모르는 나이대의 아이들이 있다면 그런 ‘아파트’는 지옥이 된다.
몇 주 전 아랫집 남자와 싸웠다. 놀라지 마시라, 우리 집에는 온도조절장치가 없다. 그것은, 1층 집에서 설정한 온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폭풍이 예고된 그날은 집 안에만 있어도 치아가 딱딱 거릴 정도로 추웠다. 온도계의 온도를 보았다. 화씨 64도였다. 62도 이하면 뉴욕시에 신고할 수 있는 온도인데 2도가 모자랐다.
한 번 분노의 스팀이 끓기 시작하면 미친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나는 그날 밤 참지 못하고 아랫집 남자에게 증기를 뿜어댔다. 24시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랫집 남자는 예상했던 대로 나의 폭주에 배 째라는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법적으로 62도만 넘으면 돼. 그 이상 너한테 해줄 의무는 없어. 안 그래도 이 시국에 월세를 150달러 더 인상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한 뒤라 그런 그가 더더욱 괘씸했다.
얼마 전, 집주인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루아침에 이 집은 아들의 소유가 됐다. 부자 아빠가 남겨주고 간 돈으로 남자는 종일 집에서 놀며 약을 빤다. 눈이 허리까지 와도 삽질은 안 하는 주제에 집구석에 누워 나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결단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집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자, 이제 이 놈의 집을 나가 새로운 월세집을 찾아보자. 다른 곳에서 ‘집 없는 가벼움’을 맘껏 누리자! 집 없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었다고 우기면서. <무소유>와 <월든>을 교과서처럼 옆구리에 끼고서.
이제 찌질이가 되었으니 이런 생각만 한다. 노마드적 삶을 동경한다는 바깥양반. 니가 원하던 삶이 이런 거였니? 차라리 진짜 유목민처럼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사는 편이 낫겠다. 거기에는 최소한 아랫집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공부하느라 많은 돈을 쓴 덕분에 남편은 음악가에 법률가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얹게 되었다. 학위와 변호사 자격증 따위가 별게 아닌 건 아니다. 지금도 그걸로 벌어먹고 사니까. 그러나 그가 부잣집 도련님이 아닌이상 그는 공부를 위해 다른 걸 포기해야만 했다. 막말로 우리는 집 살 돈과 학위를 엿 바꾸어 먹었다. 차이점은 집은 돈만 있으면 사지만, 학위는 돈을 들여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그렇게 해낸 게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는데 서러운 마음이 나를 지배하고 보니 그깟게 다 뭐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가겠다고 큰 소릴 쳤는데 아직 갈 집이 없다. 얼마 전 남편이 뉴저지로 이직을 했으니, 그쪽으로 이주할 작정이었지만 만만히 봤던 뉴저지 렌트비가 입을 떡 벌리게 만든다. 이럴 때는 아무 눈치 안 보고 쾅쾅 못질해도 되는 집, 헤비메탈을 들어도 되는 집, 밤에 청소기를 돌려도, 밤새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도 상관없는 집으로 가고 싶다. 무엇보다 뒷마당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집이라면 좋겠다. 언젠가 학교 가는 큰 아들이 기우뚱 걷는 모습을 보고 속상했던 적이 있다. 아랫집이 신경 쓰여 엄마는 매일 ‘뛰지 마!’를 입에 달고 살았고 착한 아들은 8년 평생 중 절반을 집 안에서 발꿈치를 들고 다녔다. 이게 버릇이 돼서 아들의 걸음걸이는 뒤꿈치를 들고, 체중을 발가락 쪽에 싣는 걸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집 없는 설움’이란 녀석이 스스로 물러나고 나면 ‘집 없는 가벼움’이 은근슬쩍 다시 찾아 올거다. 그걸 기다리거나, 그전에 적당한 집을 찾거나 지금은 둘 중에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