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산다
“나는 그냥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줘. 산 사람 가질 땅도 없는데 어차피 썩을 몸, 죽은 사람까지 한 자리 차지해 후손들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
“동해 바다? 아님, 존스 비치도 괜찮아? 풉!”
죽음을 얘기하는 진지한 순간이었지만 동해 바다와 존스 비치의 어감이 달라도 너무 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감의 간극만큼이나 물리적인 거리도 참 먼 두 곳이다.
“바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어.”
“난 싫어. 나는 화장해서 한국에 뿌려줘. 사실 화장하는 것도 좀 무섭긴 해. 무서운 감정은 산 사람의 것이지만 그래도 뜨거운 불에 사람을 태운다는 게... 좀 끔찍하지 않아?”
우리는 빨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종종 나누는 이야깃거리기도 하다. 둘 중 하나 누가 중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요 죽음이 가까운 나이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문 앞에 다가왔을 때 얘기하면 너무 늦을 것이다. 그래서 입이 찢어지게 기쁜 날에도, 나에게 주어진 날들이 무궁무진한 것 같고 날아갈 것 같이 몸이 가벼운 날에도 죽음을 생각한다.
더 이상 코인 빨래방에서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 우리는 죽음을 얘기했다. 이사 날짜가 잡혔다.
작고 낡은 단층집이지만 뒷마당과 차고가 있는 집을 계약했다. 2009년부터 월세살이를 하였으나 여태 살던 집들 중 가장 비싼 월세를 낼 것이다. 12년 전에 내던 월세와 지금의 월세를 비교하니 5배의 차이가 난다. 그러면 남편은 12년 동안 5배 많은 월세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인가!
숫자로 사람을 대하면 사람을 간단히 우습게 만들 수 있다. 지난 날 한 남자의 피땀을 소명의 수행이나 가족을 위한 희생,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결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숫자로 치환해 평가한다면 곤란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 숫자가 0이되면 어쩔 것인가. 숫자만큼 그 사람은 무가치한 것인가.
부부 사이에는 더더욱 숫자로 서로를 대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로는 안다)저질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잠시 남편의 노고를 깊이 생각했다.
뒷마당이 있는 월세집을 얻어 기쁘지만 빨래방에서 해방되는 날에도 죽음을 이야기했듯 모든 일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다.
“평생 안 죽을 것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어. 건물이 수십 채 있어도 더 재산을 모으려고 움켜쥐고 부들거리며 사는데 한심하지.”
“맞아, 집 사려고, 더 좋은 집 사고, 더 부자되려고 죽어라 일하다 죽는 건 나도 싫어.”
집을 안 사는 게 아니라 못 사는 주제에도 우리는 당당히 오늘의 처지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건조기에서 뽀송하게 마른빨래를 꺼내니 기분도 빳빳하고 뽀송해진다. 이사 가면 고물 세탁기라도 집에서 세탁할 생각에 속이 다 시원하다. 또, 4년 반 동안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는 말을 오천만 번은 한 것 같은데 이제는 마구 뛰어라라고 말해도 된다니. 갑자기 좋은 엄마가 된 것 같아 기쁘다.
집은 구했지만 세상사 ‘새옹지마’라고 근심거리도 끊임이 없다. 기쁜 일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게 살 자신이 있으며 불행이 행운으로 탈바꿈 될 때의 스릴도 별로 재밌지는 않은데 말이다.
별수 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산다. 약간 더 용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