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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Mar 16. 2021

이삿짐을 풀다가

짐의 크기는 생에 대한 미련이다.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빨래방이 아니라 집에서 말이다.

“엄마 나는 아직도 집 안에서 뛸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이 집은 천국 같아!”라는 아이의 말과 이 글의 첫 문장은 둘 다 감탄사를 품고 있다. 나이를 먹으니 자꾸 감정을 숨기게 된다. 감탄할 걸 감탄하면서 사는 게 뭐가 어떻다고.


건강하지 않을 때에야 건강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는 것처럼 없던 걸 갖게 됐을 때에야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안다. 큰 아이는 마음껏 뛸 수 있는 집에서 매일 감탄사를 남발하며 지낸다. “엄마! 나 집에서 줄넘기한다!!!!', '엄마! 침대 프레임이 있으니까 호텔에 온 것 같다!!”, ‘엄마! 안방 창문에서 뒷마당에 있는 내가 보여? 정말 엄청나다!”, “아... 이 집도,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정말 감사해!”


일주일 짜리, 한 달짜리 감사가 아니기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아이도 나도 감탄과 감사를 잊지 않기를 기도한다.


낮에 큰 소리로 말을 했다가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기를 여러 번이었다. 밤 10시에 청소기를 돌리면서 자꾸만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창밖을, 발 밑을 흘끔거린다. 내 (월세) 집에 살면서도 어지간히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았었나 보다. 아직 단독 주택에서의 삶이 어색하고 멋쩍다.


거실에 쌓인 짐을 정리하다, 페인트 칠을 하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몸상태로 잠자리에 든 지 2주가 되었다. 그 2주 동안 내 입술에는 감사와 짜증과 불평이 아무 순서도 없이 튀어나왔다. 꽃만 안 꽂았지 미친년 같이 산 두 주였다. 뭐라도 쓰는 걸 보니 이제 제정신이 거의 돌아온 모양이다. 거실에 있는 짐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갈 때마다 나의 멘털도 조금씩 자기 집을 찾아갔다. 짐을 더 많이 버렸다면 정신이 좀 더 일찍 제 집을 찾아갔을 텐데....


짐. 짐이 정말 짐 되어 진심 빡치고 무거웠다. 산처럼 쌓인 짐들을 정리하느니 차라리 내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게 빠르겠다 싶었다. 요즘 처음으로 ‘미니멀’인지 뭔지가 내 삶의 유일한 대안인 것 같이 여겨진다.


버릴 건 다 버리고 왔다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풀어보니 이걸 왜 갖고 왔을까 싶은 게 계속 나온다. 쓰레기통으로 가지 않고 이삿짐으로 분류된 물건에는 각기 구실과 의미가 있었다. 이래서 필요하고 저래서 소장 가치가 있는. 그렇게 쌓아둔 물건이 산을 이룬 것을 보며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저것들이 각자의 구실과 의미로써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럴 리 없다.


이 짐들은 거의 모두 나의 ‘결재’ 내지는 ‘결제’를 거친 것들이니 이것들이 여기에 존재하는 데에는 나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구실과 의미를 만들어 냈다. 이 짐들을 다 짊어지고 사는 것은 징그러울뿐더러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에는 Estate Sale 이란 게 있다. Garage Sale처럼 가지고 있는 물건을 싼값에 처분하기 위한 것이지만 주로 규모가 훨씬 크고 가족이 죽거나 이혼 등의 사유로 여는 경우가 많다. 집 안에 있는 거의 모든 물건들을 판다. 나는 미국에 와서 초창기에 몇 번이나 Estate Sale에 가 보았다. 호기심도 있었고 실제 필요한 물건을 싼값에 살 수 있을까 해서였다. 대체로 얼마 전 돌아가신 부모님의 짐을 처분하기 위해 자식들이 여는 세일이었다. 부모가 죽기 며칠 전 사용하던 숟가락부터 양말까지, 미련 없이 내놓는 것이 자식이다. 집 전체의 모든 물품이 판매 대상이므로 할머니가 어제까지 쓴 것 같은 그릇과 머리빗, 슬리퍼가 다 그대로 할머니가 정한 제자리에 놓여 있다.


누구도 할머니의 머리빗을 보며 울지 않는다. 1달러에 팔리거나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뒤로 나는 Estate Sale에 가지 않는다. 남겨진 많은 짐들에 비하면 아직 거기 머물러 있을지 알 수 없는 사자死者의 영혼이 너무 가볍게 여겨져 슬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정리와 동시에 다시 버리기를 한다. 짐의 크기는 생에 대한 미련이다. 아득바득 짐을 모아 아득바득 살다 갔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다. 다만 처음 가져보는 것들 몇 가지로 감탄하며 살련다. 세탁기와 건조기, 새 전자레인지와 뒷마당을 누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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