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카타르시스
나무나 꽃들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배운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있는 화초를 보면서도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
가재발 선인장이 며칠 전부터 혼자 툭툭 잎을 떨군다. 이 선인장은 마디마디가 연결된 형태의 이파리를 가지고 있다. 조용한 집안에서 마룻바닥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놀라 바라보면 어김없이 일부 마디가 떨어져나가 있다. 한때는 예쁜 꽃을 피우기도 했었는데. 얘 자꾸 왜 이러는거야. 자연이 주는 교훈은 보통 따뜻하지만 이 문제를 대하는 나는 이상하리만치 비관적이다. 예전 같았으면 ‘성장을 위해 내 몸의 일부를 버리기까지’하는 나무의 희생이라며 감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딴판이다. 떨어진 이파리에 내 자신이 빙의됐기 때문이다. ‘제발 날 떨구지 말아 줘, 부디 버틸 때까지 버텨줘!’라고 처절하게 외친다. 그런데도 가재발 선인장은 매몰차다. 나는 낙하한다. 툭! 버려진 다른 이파리들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가재발 선인장이 잎 마디마디를 떨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하게 모른다. 이게 결국은 다 같이 죽는 길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저 살자고 나만 죽이는 길인지. 결과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떨구어진 잎들을 보면 상심하게 된다.
가재발 선인장의 상태가 시원치 않은 것처럼 내 주변에서 정말 ‘별로’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지인이 말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래요.’ 나보다 인생을 더 산 선배로서의 충고였다. ‘정말, 정말로 그런 건가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열정도 용기도 없었다. 대체로 염세주의자였던 주제에… 세상이 아직 아름다운 곳이라 믿고 살았던 사람인 양 실망한 나 자신에 또 실망한다. 지인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같은 처지가 된 그의 목소리에도 아픔이 서려있었으니까.
세상에 삐쳐 잔뜩 엉망인 채로 책을 밀어내기만 했다. 그러고 나니 희한하게 글이 쓰고 싶어졌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집어넣는 게 아니라 빼내는 거란 걸 깨달았다. 고이고 썩고 냄새나는 생각을 글로 배출해 내는 것. 똥이 제때 나와야 질병에 안 걸리듯, 고이기만 하는 생각을 배설해야 했던 것이다. 더 구린내를 풍기기 전에 말이다. 그 구린내는 나를 병들게 한다. 그나저나 내가 좋아하는 똥 얘기를 이렇게 다시 꺼내게 되어 무척 기쁘다. 똥 얘기는 언제나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카타르시스’란 그야말로technically 의학적 술어로써 ‘배설’을 뜻한다. 나의 구린 마음은 글쓰기를 통해 배설되고 정화되며 더 나아가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누군가는 온갖 고뇌 내지는 낙담, 부정적인 생각들을 뾰루지 사이즈로 만들어 그것 떼어내듯 떼어내면 그만이라고 했다. 확대 해석하지 말고 간단히 여길 수록 네 정신건강에 좋다는 해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떼어내는 행위에 주목한다. 버려진 가재발 선인장 같은 기분을 어떻게 떼어낼 것인가? 떼어내는 행위는 내게 배설, 곧 글똥을 싸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카타르시스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지고 싶다.
“지만 아는 개소리를 어렵게도 써놨네”라고 욕해도 좋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쾌변했거든.
I k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