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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Sep 21. 2022

가재발 선인장

feat. 카타르시스

나무나 꽃들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배운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있는 화초를 보면서도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


가재발 선인장이 며칠 전부터 혼자 툭툭 잎을 떨군다. 이 선인장은 마디마디가 연결된 형태의 이파리를 가지고 있다. 조용한 집안에서 마룻바닥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놀라 바라보면 어김없이 일부 마디가 떨어져나가 있다. 한때는 예쁜 꽃을 피우기도 했었는데. 얘 자꾸 왜 이러는거야. 자연이 주는 교훈은 보통 따뜻하지만 이 문제를 대하는 나는 이상하리만치 비관적이다. 예전 같았으면 ‘성장을 위해 내 몸의 일부를 버리기까지’하는 나무의 희생이라며 감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딴판이다. 떨어진 이파리에 내 자신이 빙의됐기 때문이다. ‘제발 날 떨구지 말아 줘, 부디 버틸 때까지 버텨줘!’라고 처절하게 외친다. 그런데도 가재발 선인장은 매몰차다. 나는 낙하한다. 툭! 버려진 다른 이파리들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가재발 선인장이 잎 마디마디를 떨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하게 모른다. 이게 결국은 다 같이 죽는 길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저 살자고 나만 죽이는 길인지. 결과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떨구어진 잎들을 보면 상심하게 된다.  


가재발 선인장의 상태가 시원치 않은 것처럼 내 주변에서 정말 ‘별로’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지인이 말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래요.’ 나보다 인생을 더 산 선배로서의 충고였다. ‘정말, 정말로 그런 건가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열정도 용기도 없었다. 대체로 염세주의자였던 주제에… 세상이 아직 아름다운 곳이라 믿고 살았던 사람인 양 실망한 나 자신에 또 실망한다. 지인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같은 처지가 된 그의 목소리에도 아픔이 서려있었으니까.


세상에 삐쳐 잔뜩 엉망인 채로 책을 밀어내기만 했다. 그러고 나니 희한하게 글이 쓰고 싶어졌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집어넣는  아니라 빼내는 거란  깨달았다. 고이고 썩고 냄새나는 생각을 글로 배출해 내는 . 똥이 제때 나와야 질병에  걸리듯, 고이기만 하는 생각을 배설해야 했던 것이다.  구린내를 풍기기 전에 말이다.  구린내는 나를 병들게 한다. 그나저나 내가 좋아하는  얘기를 이렇게 다시 꺼내게 되어 무척 기쁘다.  얘기는 언제나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카타르시스 그야말로technically 의학적 술어로써 ‘배설 뜻한다. 나의 구린 마음은 글쓰기를 통해 배설되고 정화되며  나아가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누군가는 온갖 고뇌 내지는 낙담, 부정적인 생각들을 뾰루지 사이즈로 만들어 그것 떼어내듯 떼어내면 그만이라고 했다. 확대 해석하지 말고 간단히 여길 수록 네 정신건강에 좋다는 해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떼어내는 행위에 주목한다. 버려진 가재발 선인장 같은 기분을 어떻게 떼어낼 것인가? 떼어내는 행위는 내게 배설, 곧 글똥을 싸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카타르시스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지고 싶다.


“지만 아는 개소리를 어렵게도 써놨네”라고 욕해도 좋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쾌변했거든.

I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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