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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이 깜빡일 때 생각나는 여인

홍보인, 색으로 너를 말해줘!

by LBR

회사에서 사내 메신저로 슬랙을 썼었다. 무릇 홍보인이라면 자기만의 이미지를 파악해 어필할 줄 알아야 한다(번역 : 각자 슬랙 프로필 사진을 업데이트하시오)는 대표님의 의견으로 모두가 제각각 프로필 사진을 등록했다. 음, 뭐랄까. 사내 슬랙은 그야말로 '개'판이되기 시작했는데 오해 없으시길. 정말 귀여운 강아지들의 향연이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이렇게나 마음이 따뜻한 동물 애호가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케 했다. 여기가 홍보회사인지 애견센터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슬랙의 프로필에는 약속이나 한 듯 각종 강아지와 고양이 사진이 떠다녔다. 전체 대화방에서 한 마디씩 하면 마치 왈왈 냐옹~~하는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까르르 웃으며 귀엽다고 좋아했지만 사이버 상에 펼쳐진 사내 동물농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나와 비슷한 동물 울음소리를 느끼셨을거라 짐작되는 나의 보스께서 새로운 제안을 하셨다. 슬랙의 프로필 사진을 컬러기업으로 유명한 '팬톤' 사이트에서 각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상으로 지정해 변경해 두자는 의견이었다. 색이 서로 겹치면 안 된다는 무언의 룰이 있었으므로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인 눈치게임이었다. 나는 고민 없이 보라색 카테고리로 들어갔고 3분이면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뭐라고, 그냥 하나 고르면 되잖아. 이게 이럴 일이야? 하면서도... 어쩌겠는가. 내 마음에 꼭 드는 보라색을 찾고 싶은 것을. 그때 수많은 색상표의 보라를 마주하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그래, 보라라고 다 같은 보라가 아니지.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간 일을 못할 거고 당연히 퇴근도 못할 것 같아 일단 누가 봐도 나 보라색이요 하는 울트라 바이올렛 컬러로 프로필을 변경해두고는 다시 일 속에 파묻혔다.



그 뒤로 사내 슬랙의 프로필에는 온갖 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나의 보스께서는 민트색, 병아리 같은 나의 인턴은 노란색, 입사 동기는 각각 핫 핑크, 연 핑크, 나의 사수였던 남자 과장님은 짙은 그린, 여자 과장님은 블랙 등등. 막상 해놓고 보니 본인의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리는 색상들이어서 놀라웠다.


그때 이후로 누군가 대화창에 멘트를 띄울 때면 언뜻 봐도 색으로 구분할 수 있어 편리하기도 하고 색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대화창에 민트색이 깜빡이면 긴장했다. 앗, 보스시다. 내가 무얼 놓쳤는가. 노란색이 깜빡이면 아 우리 인턴 친구 노랑이가 일을 마쳤구나. 뭐지 계속 대화가 올라오네. 무슨 일이 생겼나. 짙은 그린색이 깜빡일 때면 아 과장님이 피드백을 주시려나보다. 이번엔 나의 초안을 어찌 보셨으려나.


시각적 각인이 주는 반복적인 효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그 뒤로 지나가다가 특정 색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 사무실의 그 사람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테다. 우리 사무실의 누군가도 보라색만 보면 내가 떠오르겠지. 내가 주는 보라색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때론 헐겁고 때론 앙칼지고 때론 빵을 굽고 메시지를 써주는 우리 회사 이대리. 사내 메신저에서 보라색이 깜빡일 때면 나의 인턴 노랑이는 우리 대리님이 뭔가 확인하시려나보다 할 테고 나의 과장님은 이대리가 드디어 초안을 다 써냈나 하실 테고 나의 보스께서는 즉시 어떤 피드백을 기대하시겠지. 누군가에게 나의 깜빡임이 공포의 보라색은 아니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람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마다의 얼굴이 제각각이듯 사실 한 가지의 색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거다. 하지만 나의 바운더리 안에서 특정 색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어떤 키워드로 나를 기억시킬 수 있다면.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색과 이미지로 나를 표현해보면 어떨까.


당신은 무슨 색인가요?






안녕하세요?
보라색이 깜빡이면 저를 떠올려 주세요.
공포의 보라색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별 모양 스텔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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