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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하지만 위트 있게! 할 수 있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by LBR

-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해 주세요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해 달라고? 디자인을 독학으로 배운 박창선 작가가 브런치 북 대상을 수상하며 출간한 책 제목이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란 말인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혹은 '시원한 핫초코 한 잔이요'와 다를 바 없는 주문. 처음 이 책 제목이 주는 위트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을 경악게 만든다는 이 기괴해 보이는 주문은 표현만 조금씩 다를 뿐 실제로 그들이 맞닥뜨리는 곤란한 업의 애환 중 하나일 것이다. 깔끔하되 포인트는 있었으면 좋겠고 이왕 주는 포인트라면 보다 뇌리에 꽂히는 화려함이었으면 좋겠고. 이렇듯 좋은 결과물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나는 디자인 작업을 하는 직업인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이와 비슷한 주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드라이하지만 위트 있게 써 봐.
할 수 있지?



오늘 오후,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명대사와도 같은 주문을 남겨준 그녀. 나의 보스에게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 보람 대리가 마지막으로 작성하고 간 글이 오늘 포털 메인에 올라왔어! 고마워. 여기에 있는 동안 애 많이 썼어. "


공들여 쓴 글이 주요 포털 메인에 세 번째로 노출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마음이 참 많이 묘했다. 당장 그 글을 확인해보니 어제 나의 보스가 직접 입력하셨다던, <글 작성 : **피알 이보람 >이 새겨져 있었다. 순간 마음도 눈시울도 찡해왔다.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할지 몰라도 나에겐 별거였다. 나는 항상 그 채널의 글을 진심으로 공들여 써왔었기 때문이다. 그걸 아시기에 보스께서도 그 글의 마지막에 내 이름을 새겨주셨을 것이다.


포털 메인에 올라간 글을 확인한 그 순간 나의 기억은 잊을 수 없는 그날, 회사의 회의실로 점프했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우리의 술 문화 온라인 통합 홍보 담당을 맡게 되었던 날이었다. 과연 이 일에 내가 소질이 있는가에 대한 답도 안 나올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던 답답이 시절이었다. 업무 역량 강화 활동에 관한 상담 때문에 나의 보스와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나의 이런 고민을 들으신 그분은 한방에 쿨한 처방을 내려 주셨다.


" 아직도 그 고민하고 있는 거야? 내가 이 일이랑 맞을까? 그런 생각은 하는 게 아니야. 왜 그런 줄 알아? 어차피 해결이 안 되거든. 그런데 에너지 낭비하는 게 제일 쓸데없는 일이야. 이 일이 싫지 않아 다시 왔다면 그냥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나아질지만 생각해. "


아, 그런 고민은 하는 게 아니구나.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내가 더 나아질 방법이 있기는 한가에 대한 2차로 쓸데없는 고민을 시작하려던 찰나. 나의 표정을 읽은 보스의 지령이 떨어졌다.


" 이 일, 홍보 메인 담당 한 번 해 봐! "


이렇게 버벅거리고 있는 나에게 그 큰 프로젝트를 맡기시는 건가요. 절 믿으시나요. 하는 눈빛도... 역시나 읽혔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잘 읽히는 프로 투명러일까.


" 해 봐. "


카리스마 가득한 지령이 확인사살처럼 내려지고 그렇게 나는 그 프로젝트 메인 담당자가 되었다. 당시 나의 보스, 그리고 이 일이 나에게 주는 어떤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간 계획안에 들어갈 콘텐츠를 넣기 위해 날마다 온갖 주류 SNS 채널을 돌아다니며 엑셀 시트를 채웠다. 매달 새로운 이벤트를 짜내기 위해 온갖 이벤트 레퍼런스를 모았다. 그중 글쓰기에 가장 공들인 채널은 블로그였다. 각 테마를 정해 우리의 술을 홍보하고 채널의 유입률을 높일 수 있는 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해당 채널들은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점, 젊은 층들뿐만 아니라 고관여자들이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마냥 가볍고 재밌게만 쓸 수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 재미없는 글은 보고 싶지 않으시다는 나의 보스께서 다음과 같이 주문하셨다.


" 드라이하지만 위트 있게 써야 해. 할 수 있지? "


주문을 하신 그분도, 듣고 있던 나도 잠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빵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드라이하지만, 위트 있게라. 건조하게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는 글. 처음 메인을 담당했던 만큼 나도 욕심이 생겼다. 단순 정보성 글은 절대 쓰기 싫었다. 어디에 노출돼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맛 표현을 기갈나게 잘하는 매거진 에디터들의 글을 보고 좋은 표현과 문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필사도 해보고 내 콘텐츠에 새로 응용도 했다.


그런 나의 소소한 노력들은 서서히 티가 나기 시작했다. 클라이언트도, 업계 관계자분들도 점점 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쓰는 그 글들을 잘 보고 계시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렇게 열심히 쓴 글이 처음 N사 포털 푸드판 메인에 노출이 되었을 때, 그게 뭐라고 너무 기뻐 폴짝폴짝 뛰었다. 그날 저녁에도 나에게 전화로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 역시 나의 보스였다.


" 보람, 고생 많았어! "


그 뒤로 나는 이 드라이하지만 위트 있게 써야만 하는 글에 더욱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작지만 큰 성취감을 안겨준 소중한 일이었고 방황하고 있던 나를 믿고 맡겨준 데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인정 욕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이 일을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옛 기억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시 나의 보스가 알려준 나의 글을 찾아 들어가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생각하고 쓸걸.



글 작성 : **피알 이보람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드라이하지만 위트 있게. 디자이너도, 기획자도, 홍보인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비슷한 결을 가진 주문들. 하지만 그런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고민한다. 심플함에 담을 수 있는 화려한 포인트를. 드라이한 문장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소소한 재치를. 오늘은 그 일을 맡아오며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많이 배우고 쌓아왔던 감사한 부분만 생각하련다. 그리고 오늘 밤 나 자신에게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보다 훨씬 더 기가 막힌 주문을 하나 해볼까 한다.





여유로우면서도 열정 있게!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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