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을 위한 불금 메시지
휴학 한번 없이 4년을 스트레이트로 졸업했던 나, 벌써 사회에 나온지도 10년째다. 여러 곳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해봤지만 가장 인상적인 활동을 꼽으라면 회사 동호회도 아니고, 사내 문화 활동도 아닌 바로 금요일마다 마스크를 쓰고 토스트를 구워 직원들에게 돌리던 일이었다.
금요일 아침 빵 굽는 여자가 된 사연은 회사 내에 각종 사내 봉사 팀이 생기며 시작되었다. 홍보 업무 이외에 회사 내에서 직원들의 케어가 필요한 부분들을 나누어 팀이 만들어졌다. 팀은 총 3개였다. 당시 회사에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었으므로 동물 복지팀(그들의 식사와 화장실 청소, 털 빗어주기 등을 담당한다), 식물 복지팀(회사 외부에 있는 각종 식물들에게 물을 주어 그들이 말라죽지 않고 잘 자랄 수 있게 케어한다), 그리고 동물 복지와 식물 복지보다 어쩌면 더 서열이 낮을지도 모르는 직원 복지팀(말 그대로 회사 내 직원들이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자잘한 일들을 케어한다).
눈치게임에 실패한 나는 남는 자리인 직원 복지팀에 속하게 됐고,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사람인 직원들을 케어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매우 자잘하게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됐다. 물론 손 많이 가는 여자 이대리보단 아니겠지만.
회사 경영지원팀에서는 아침 못 먹고 출근하는 직원들을 위해 식빵을 사다 놓곤 했는데 그 빵은 늘 먹는 사람만 먹었다. 이유는 두 가지. 첫 째, 토스트기에 직접 구워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뭔가를 발라 먹는 것도 귀찮았던지 딸기잼, 크림치즈, 누텔라는 줄지 않았다. 사실 아침의 허기가 문제가 된다면 바람도 쐴 겸 편의점으로 걸어 나가 이미 온갖 달콤함으로 무장한 빵이나 주전부리를 사 오면 될 터였다. 둘째,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그럴지 모르겠지만 특히 홍보인들은 아침 출근 직후가 가장 진땀 빼는 시간이다. 그날의 뉴스 기사를 정리하고 요약해 고객사로 발송해야 하는 데일리 뉴스 클리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출근하자마자 그날의 기사를 검색해 클리핑 섹션을 채운다. 설사 토스트기에 빵을 넣어 굽기 레버를 꾸욱 눌렀다 하더라도 까먹기 딱 좋다. 좁은 탕비실에서 빵이 구워지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조차 힘들 정도로 모두가 아침 업무에 허덕이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연유로 빵 먹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보니 이 얼마 없는 빵 복지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복지는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법. 나 역시 입사 후 한 번도 회사에서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 구워 먹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 훈훈한 아침 빵 복지만은 사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물론 클리핑 업무가 있는 PR팀으로서의 본업이 있으나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누군가 직접 빵을 구워 가져다주면 먹게 되지 않을까? 그 단순한 생각으로 직원복지팀 회의 시간에 손을 들었다.
" 그 빵, 제가 굽겠습니다! "
거의 '그 왕, 내가 만들어드리겠소이다(광해)' 혹은 '내가 조선의 국모다(명성황후)'급의 비장함이었으므로 나의 보스 포함 모두가 놀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매주 금요일 아침, 이대리 토스트 타임이 시작되었다.
첫 주에 사내 단체 메신저에 공지를 했다. 나름 메뉴 이름도 정했다.
1. 노잼 토스트 (아무것도 안 바르고 Only 굽굽)
2. 딸기잼 토스트 (가장 아름다운 비주얼을 자랑하는 토스트 계의 정석)
3. 누텔라 토스트 (꿀맛 보장! 맛없으면 사기! 악마의 누텔라 듬뿍)
역시나 예상처럼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다. 인턴도 아니고 대리가 직접 구워 자리까지 가져다주겠다는 토스트를 모두가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한 인턴 친구와 직원 케어팀의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
" 샘플로 하나씩 먹어봐 줘. "
천사 같은 그녀들은 흔쾌히 오케이 했고 그리하여 빵 굽는 여자 이대리 타임 첫날의 주문은 노잼 토스트 두장이었다. 그날 난, 회사의 토스트기를 처음 작동시켜봤다. 켜는 방법조차 몰랐던 토스트기에 파란 불이 들어오자 내 마음엔 빨간 불이 들어왔다. 두근두근. 이거 다 태워먹는 거 아닌지. 핑크 무드 가득한 신혼집에서 남편을 위한 아침밥으로 토스트기에 구운 식빵이 뾰롱하고 튀어나오는 장면은 늘 뽀얗게 처리되어 미화된 내 상상 속의 시각화 장면이었는데 그게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비좁은 탕비실, 뽀얗지 않은 현실적인 햇살 조명, 낡은 토스트기. 하지만 어설프게 이 일을 시작하며 이거 하나만큼은 다짐했다.
이왕 하는 거,
진심 담아서
제대로 하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좋아하는 PR팀 직원들이었고 그들이 먹는 빵이었다. 귀찮게 여기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어야 해 하는 마음으로 하면 모든 게 다 일이고 하기 싫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구워준 토스트를 먹는 직원들을 내 남편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조금 슬프다만) 웃긴 얘기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진심을 담을 수 있었다.
처음이라는 건. 첫사랑만 어색한 게 아니다. 매우 어설프게 구워진 두 장의 토스트가 탄생했다. 굽기 조절하는 방법 조차 몰라 미미하게 데워진 토스트를 바라보며 이대로 내어주기가 미안해졌다. 그러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직접 필사한 메시지를 곁들여 주면 이 어설픈 빵이 조금은 더 특별해지지 않을까?
급하게 메모지를 찾아 평소에 좋아하는 문장들을 캡처해놨던 이미지를 찾아 짧은 필사 메시지를 곁들였다. 이렇게 빵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나중엔 무슨 메시지를 받아볼까 궁금해서라도 빵을 먹지 않을까. 어떻게든 먹이겠다는 나의 눈물겨운 노력. 아시나요...?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가상했는지 그다음 주에는 총 6명의 PR팀 직원들이 토스트를 신청했고 굽기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미숙한 나의 실력도 아주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노잼 토스트를 선호하는 직원들이 많아 노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P 베이커리에서 발견한 '꿀 토스트'를 쓰기 시작했다. 그냥 토스트 빵보다 천 원이 더 비쌌지만 그 천 원의 가치는 놀라웠다. 노잼이라도 적당한 달콤한 맛으로 토스트를 즐길 수 있었던 것! 직원들이 훨씬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너무도 즐거웠다.
저에게
좋아하는 책, 노래, 영화를
알려 주세요!
빵을 굽고 메시지를 적어 내는 일을 시작하며 직원들에게도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필사 메시지가 한 몫했다. 빵과 함께 나가는 메시지는 모든 직원들에게 매주 다르게 나갔다. 목요일 밤 집에서 다양한 메모지에 필사 메시지를 미리 적어 두었다. 그들이 재밌게 봤다는 영화나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만화 대사 등을 기억했다가 써주면 한 번이라도 더 웃게 만들어줄 수 있었으니까. 나한테 만화 '원피스'를 재밌게 봤다는 말 한 번 잘못했다가 퇴사할 때까지 만화 메시지만 받아간 직원도 있었다. 한 주간 유난히 더 힘들어 보이는 직원이 있다면 이번 주 금요일엔 이 메시지를 써서 빵을 구워줘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직장인의 금요일은 소중하다. 누누히 말했지만 회사에 다시 돌아오고 가장 큰 변화는 금요일의 즐거움을 되찾았던 것이었다. 불금저퉬(불타는금요일저녁너무도짧은토요일일요일의 약자로 이대리 용어)이라는 그 짧은 쉼표의 시간이 있기에 우리는 또 워-얼 요일을 맞이할 수 있는거니까.
빵을 굽기 시작했던 날 이후로 금요일 아침은 접시를 받고 한 번이라도 싱긋 웃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들은 훗날 나의 토스트를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팍팍한 사회생활 속에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줄 수 있었다면. 가뜩이나 설레는 금요일, 더욱 설레는 아침을 보낼 수 있었다면. 나의 직원 케어 프로젝트는 성공이다.
지금도 금요일 아침이 되면 빵 굽던 생각을 한다. 내가 구웠던 빵을 먹었던 그대들도, 어딘가에서 주 5일의 고단함과 주말의 설렘을 함께 맞이하고 있을 모든 직업인들에게 바치고 싶은 나의 메시지.
한 주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stella 드림
* 특별부록 : 그간 구웠던 토스트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