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 일기 - 내 자신을 믿어주기
심리치료는 아주 작은 점에서 시작해 큰 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듯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내가 느끼기에도 상태가 많이 좋아졌고 회복 과정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도 점점 변했다. 초반에는 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포커스를 많이 맞췄다면 뒤로 갈수록 조금 더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급한 불을 끄고 보니 큰 불에 가려진 작은 불씨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느끼는 걱정과 힘듦의 크기였다.
살면서 크게 바닥을 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그 정도의 깊이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공포감은 어느 정도 회복을 한 후에도 약간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상태가 많이 좋아져 잘 지내다가도 문득 사소한 것에 불안감과 걱정을 느낀다. 불안과 걱정은 건강한 사람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지만 나는 한 차례 큰 몸살을 앓아서인지 작은 불안이 가져오는 마음의 파도가 꽤 컸다. 바닥에 부딪혔을 때의 고통과 그 순간 올라오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다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내 자신을 나무라게 된다. "왜 이렇게 사소한 걸로 힘들어하고 그래? 별 거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격려의 차원으로 하는 말이지만 지레 겁을 먹어서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사소한 일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나, 괜찮을까요? 테라피스트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아니, 하소연을 했다. 남들은 이런 일로 걱정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자꾸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 같다고. 테라피스트는 역시나 대답 대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람, 네가 갖고 있는 걱정거리가 왜 사소한 거야?" 음...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라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내 걱정거리가 사소한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테라피스트는 걱정의 크기는 아주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다. 사소한 걱정처럼 보일지라도 몸이 느끼고 반응하는 공포감의 정도는 실제로 사자를 대면할 때의 공포감과 같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들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뭐라 하던 나는 사자를 대면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걱정과 불안에는 절대적인 크기가 없다. 게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내 자신을 다그칠 때 "이 정도가 뭐가 힘들다고 그래?"라고 내면의 목소리를 내곤 했지만 사실 "이 정도"라는 게 얼만큼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내 자신을 몰곤 했다. 걱정과 불안에는 정해진 크기도 없고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도 없는데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자로 잴 수 있는 것처럼 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걱정하는 것들마저도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나만큼 힘들까? 내가 너무 약한 거 아닐까?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자신을 더 믿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마음이, 내 영혼이 힘들다고 말할 땐 정말 힘든 것이다. 내 마음이 걱정된다고 말한다면 정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마음을 남의 마음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느끼는 게 바로 정답이니까. 걱정과 불안, 힘듦의 크기는 자로 측정해 눈으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봐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에 대한 자기 신뢰감이 바탕이 돼야 하고 자기 신뢰감은 내가 내 자신에게 주는 사랑을 먹으며 자란다.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로 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그만하기로 한다. 대신 내 마음을 좀 더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자상한 주인이 되어 보고 싶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며 붙어있는 마음인데 내가 믿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믿어준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연민의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네가 느끼는 힘든 감정들은 타당한 거야. 언제나 너의 편이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