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 일기 - 나아지고 있는 걸까?
브런치에 지난 3년간의 경험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터널을 지나오며 썼던 일기와 NHS 의료진에게서 받았던 유인물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됐다. 한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아픈 것 같아서 이 흔적들을 모조리 없애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모아두길 참 잘한 것 같다. 이 자취들을 보고 있으니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그 당시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그렇게 힘들던 시간이 지금은 추억이 될 정도로 멀어졌음에 감사하고,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이 호전된 내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시도해 볼 힘조차 없어서 엄두도 못 내다가 조금씩 호전되면서 테라피스트의 권유로 감정일기를 쓰게 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해소하기 위해 쓴 글이어서 어떨 때는 몇 개의 단어로 그치기도 했다. 글쓰기를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이용했던 셈이다. 지금 와서 그때의 글을 다시 살펴보니 그 당시 가장 힘들었던 건 회복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이었다. '과연 내가 나아질 수 있을까?'에 대한 막연한 답답함과 짜증, 두려움이 글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그때까지 늘 남들보다 한 템포씩 빠르게 살아왔고 성격 급한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였기에 형체도, 경과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놈과 싸워야 한다는 게 크나큰 절망감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생각만큼 빨리 나아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땐 테라피스트와 한 번씩 기싸움도 했다. 심리치료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정말 많이 나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한 차례 큰 높이 뛰기에 성공한 후 기세 등등해져 있었고 '내 것'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감정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초반에 비하면 수면의 질도 좋아졌고 생활도 많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성급하게 돌진하려는 모습이 있었고 성급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불안한 감정을 일으켰다. 한 번의 높이 뛰기 후 나는 당연히 다음 차례의 높이 뛰기를 기대했는데 그다음부터는 회복세가 지지부진했다. 슬럼프에 빠진 운동선수의 기분이 이런 걸까, 어림짐작되었다. 꾸준히 하라는 대로 열심히 치료를 받는데 왜 이렇게 나아지지 않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테라피스트에게 "우리의 마지막 세션은 언제쯤일까?"라는 질문을 서슴없이 던졌다. 얼른 빨리 더 더 더 나아져서 테라피스트와 굿바이 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거였다. 테라피스트의 "See? You rush again!" 이란 말에 우리 둘 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지만 그만큼 나는 '빨리빨리'에 익숙해져 있었고 우울증의 회복 또한 나의 바람대로 수직 상승하는 직선을 그려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다른 신체적인 병과는 다르게 꾸준한 상승 직선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곡선을 생각하는 게 맞다. 그러니 진보와 후퇴를 반복하며 회복세를 이어가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치료를 받으며 잘 나아가다 막히는 느낌이 들어도 그건 절대 끝이 아니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부분일 뿐이다. 지금은 하향세를 보이는 것 같아도 그건 다음에 더 높이 올라가려는 발판이니 말이다.
나는 이제 이 시간 속에서 배운 경험들을 토대로 살아간다. 업과 다운을 반복하며 상승하는 곡선이 꼭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지 않은가. 오늘이 힘들다고 내일도 힘들라는 법은 없다. 오늘의 힘듦은 어쩌면 내일의 행복을 위한 발돋움일 수도 있으니까. 터널을 나온 요즘도 나는 걱정과 불안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는 오래된 습관들을 깨부수는 연습을 한다. 30년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이건 아마 내가 평생 해야 하는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이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주길 바라는 내 마음속의 판타지는 영영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신 삶이 내 뜻처럼 흘러가지 않아도 이 흐름 끝에서 마주할 내 자신을 상상해본다. 분명 더 단단해져 있을 내 모습을.
작은 후퇴 뒤에 다가온 성장의 카타르시스는 한여름 밤에 마신 맥주만큼이나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