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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람 Dec 15. 2022

대충 살아도 괜찮다

소풍을 가는 마음으로

내가 우울증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나에게 다양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힘내 보람아, 응원할게,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등등.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에는 그런 따뜻한 응원의 말들조차 힘이 되지 않았다.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물 밖의 사람이 아무리 소리쳐봤자 잘 안 들리는 것처럼 그냥 멍멍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도 나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때 한국에서 내 소식을 들은 동생 한 명이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언니, 우리 그냥 대충 살자." 아프기 전에는 모욕적으로 들리던 이 말이 희한하게 그 순간만큼은 큰 위로로 다가왔다. 위로를 넘어 따습게 들리기까지 했다. 많은 것을 내려놓은 지금, 이제 이 말은 내 인생의 모토이기도 하다. 대충 사는 삶.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정말 열심히 살려고 한다. 단기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한국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다. 한국은 지독한 결과주의 사회다. 그럴싸한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내가 열심히 노력한 과정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비록 근사한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노력하며 겪은 경험이나 감정은 내 속 어딘가에 남아 단단한 자양분이 되었을 텐데 이걸 좀 봐달라고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건 한국 사회에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저 성적표에 찍힌 점수나 통장에 찍힌 잔고만이 내가 살아온 인생을 대변해 줄 뿐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인생을 압축해 보여줄 결과를  하나라도  만들기 위해. 오죽하면 한국어에는 '열심히 공부해요', '열심히 일해요' 넘어 '열심히 살아요'라는 표현까지 있다. Study hard, work hard까지는 이해하겠는데 live hard 뭐란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순간 전력을 다해    초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있을까. 나는 지금도 열심히 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숨이 붙어있으면 알아서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인생 아닌가? 내가  일은 그저  몸이 숨을    있도록 돕는 것뿐이다.


그때 동생이 말한 '대충 살자'는 의미는 분명 개차반처럼 막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 기본기에 충실하며 살자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시간과 정성을 쏟아 열심히 하되, 인생 자체를 마치 하나의 거대한 퀘스트처럼 도장깨기 하듯 살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생을 하나의 여행으로 본다면 엑셀만 밟을 것이 아니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감상하고 내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도 한 번씩 보면서 즐거운 소풍을 다녀오는 마음으로 사는 삶 - 이게 기본기에 충실한 인생이 아닐까.


너무 열심히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Live hard 대신 live well, 건강하게  쉬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이미 살아지고 있다. 요즘 말대로 낄끼빠빠,   끼고 빠질  빠지는 인생을 살아보고자 한다. 계속 끼기만 하다가 에너지가 방전되는 대신에.

힘을 빼고 바람따라 흘러가는 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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