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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람 Oct 27. 2022

불안에게 방석을 내어주는 법

심리치료 일기 - 불안함과 맞서기

우울증은 우울에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신체적, 정신적 증상을 동반한다. 잠을 잘 자기가 힘들고 불안한 감정이 수시로 든다. 배가 살살 아프기도 하고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기도 하다. 내가 경험했던 증상들 중 가장 힘들었던 건 우울증과 함께 동반된 불안이었다. 우울증과 이별하고 시간이 제법 많이 흐른 요즘에도 불안한 감정이 불쑥불쑥 나를 찾아온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탓도 있다.


우울증이 생기고 나서 두 번의 심리치료를 받았다. 첫 시도에서는 NHS가 연결해준 테라피스트에게 CBT 인지행동치료를 받았다. 심리치료라고 하면 편하게 소파에 앉아 테라피스트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걸 상상했는데 CBT는 그것보다 수업에 가까웠다. 내가 불안한 이유를 한번 분석해보고 그러한 불안감이 찾아올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듯해 보였던 테라피스트는 매주 정해진 주제에 대한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공부한 것에 대해 숙제를 해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내용이 이해됐지만 내가 정말 불안한 이유의 뿌리에는 닿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CBT의 한 사이클을 끝냈지만 나는 호전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결국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두 번째 시도에서는 사설 기관에서 talking therapy를 받게 되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그렸던 전형적인 심리치료의 모습이었다. 이전의 시도가 별 도움이 안 되었기에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 배정된 테라피스트는 머리가 희끗하고 중후한 느낌이 나는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이미 한 차례 심리치료에 실패한 기록이 있어서 경력이 많은 선생님을 배정받았다. 선생님의 내공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이 분 앞에만 앉으면 발가벗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나를 꿰뚫어 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 느낌이 싫었는지 무의식적으로 코트도 벗지 않고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가 된 상태로 테라피를 받았다. 나도 몰랐는데 시간이 꽤 흐른 뒤에 선생님이 "보람, 이제야 나랑 좀 편해졌구나? 너 드디어 코트를 벗고 가방을 내려놨어."라고 하셨다. 나는 그만큼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나는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불안해지지 않을 수 있는지 바로 해답을 알려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엉뚱하게 나의 신체적인 증상에 대해 물어봤다. "그래서 불안할 때 몸의 증상이 어때?" 나는 내가 불안할 때 겪는 신체적 증상을 설명했다. "심장이 정말 빨리 뛰고 진정이 잘 안돼. 머리로는 분명히 진정을 시키고 있는데 마음이 잘 안 따라가는 것 같아. 진정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심장이 더 빨리 뛰고 숨도 잘 안 쉬어져. 밤에는 잠들기 힘들어서 수면보조제를 먹어야 해." 그때 선생님의 반응은 이랬다. "진정을 왜 하려고 하는 거야?" 이게 뭔 개소리인가.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당연히 불안하니까 그렇지. 그 상황에서 누가 계속 불안하고 싶겠어?"라고 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기가 막힌 팁 하나를 알려주셨는데 이 팁은 지금까지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보람, 불안감(anxious feeling)은 네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계속 너를 쫓아올 거야. 허우적거릴수록 몸이 더 빨려 들어가는 진흙밭과도 같아.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불안감 속에서 네가 존재하는 거야."


너무 맞는 말이었다. 불안감도 하나의 감정인 것을. 나는 왜 그걸 피하려고만 했을까? 생각해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감정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그렇다. 부정적인 감정은 재빨리 잊어버리거나 훌훌 털어버리는 게 상책이다. 우는 아이에게 "이거 가지고 왜 울어? 울지 마."라고 말하는 어른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하지만 행복한 감정이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듯이 부정적인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슬픈 감정도, 불안한 감정도 내가 도망가거나 등 떠민다고 해서 쉽게 우릴 떠나가 주진 않는다. 감정의 주체로서 정식으로 그 친구들을 환영해주고 인정해줘야만 비로소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날 선생님은 "불안감에게 자리 내주기"란 숙제를 내주셨다. 또다시 불안감이 찾아올 때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않고 불안감과 함께 공존하는 법을 연습해야 했다. 이 연습을 위해 불안감을 내가 좋아하는 동물에 빗대었다. 앞으로 불안감은 아기 고양이가 될 것이다. 불안감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아기 고양이에게 방석을 내주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봐 줄 것이다.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그날부터 몇 달 간을 불안감에 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연습을 했다. 한번 형성된 신경 회로를 바꾸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연습할수록 불안감이 머무르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수면보조제를 먹고 잠드는 날들이 점점 줄었다. 나는 지금도 불안감이 엄습할 때면 의식적으로 아기 고양이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연상한다. '아, 너 또 왔구나. 잘 왔어. 네가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르다가렴.'


우리는 모든 감정을 공평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듯이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기쁨과 행복을 포함해 슬픔과 우울함, 불안함도 모두 다 느낄 감에 뜻 정을 쓴 감정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들은 원치 않는 손님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거하게 환영해주자. 환영받은 감정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도 분명 변화가 생길 것이다. "Welcome."


매주 방문했던 나의 The school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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