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람 Oct 20. 2022

모든 일에는 때가 없는 법이다

나에게 맞는 속도로 살아가기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늘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거라고. "공부할 때를 놓치면 후회할 테니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거다." 기승 전공부 이야기였지만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남들보다 한 템포씩 빠르게 사는 삶을 지향했고 그렇게 사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나만의 가정을 꾸릴 때까지 그 '때'라는 정체에 대해 별 의심이 들지 않았다. 누가 그 '때'를 정한 건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한국 사회에서는 뭐든지 빠릿빠릿한 걸 좋아하니까 바지런하게 사는 게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너무 빨리 감기 속도로 살았나 보다. 나는 남들이 삼사십 대에 걸쳐 이룰 것들을 이십 대에 거진 다 해치웠다. 결혼, 이민, 석사학위 취득, 해외취업, 내 집 장만을 모두 20대에 달성했으니 말이다. 도장 깨기 하듯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고 해서였을까? 내 집을 마련하고 1년이 채 안 되어 멘탈에 급체가 왔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내가 왜 아픈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세상 다정한 남편이 있었고 직장이 있었고 집도 있었다. 거액의 채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회사에 꼰대 같은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고약한 가족 구성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내 인생은 겉으로 보면 그야말로 퍼펙트, 너무나도 안정되고 완벽한 삶이었다. 이러니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의 건강 소식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아픈지 모르겠는데 내 주변 사람들이 알턱이 있나.  


심리치료를 오랜 기간 받으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듯 나의 아픔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안정된 삶 속에 주인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테라피스트가 "보람, 네가 생각할 때 너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라고 물었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말 몰라서 할 수가 없었다. 석사까지 공부한 나름 고학력자인데,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게 좀 참담하면서 부끄러웠다. 기어가는 개미 목소리로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라고 답했다. 알고 보니 나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사는 people pleaser였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삶을 살아야 하고, 남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그동안 한 것들은 많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몇 개 없었다. 부모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적성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며 안정된 학과에 진학했다. 런던으로 이민을 온 후에는 그 누구보다 폼나게 살고 싶어 영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만 석사에 지원했다.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남이 작성해놓은 '잘 사는 삶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 것이다. 취업 후에는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러 가며 어깨가 무거웠고 출근길에는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서 인스타에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블로그에는 과시용의 글을 올렸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속에서 나는 들러리였고, 변두리로 밀려날수록 에너지는 빠르게 고갈됐다. 이런 삶 속에 행복이 있을 리 만무했다.


멘탈이 붕괴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제 내가 보였다. 처음으로 우울증에게 고마웠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  살았을 거란 마음으로. 그리고 ''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말 모든 일에는 ''라는  있는 걸까.  경험으로 얻은 답은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없다'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시기는 있어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있는 천편일률적인 ''라는  없다.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나라는 사람을 공부하고 알게  것처럼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한다. 일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는 서른에 겪고 다른 이는 마흔에 겪는다. 남들보다 5, 10 늦게 겪는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끝난다거나 지구가 멸망하않는다. 세상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순조롭게 잘만 흘러간다.


나는 이제 느리게 살아가는  좋다. 다른 사람들과 발맞춰 걸으려고, 아니  빨리 걸으려고 예전처럼 노력하지 않는다. 가랑이는 한번 찢어진 걸로 충분했다.


느려도 잘만 걷는 영국 오리들 - 나도 너처럼 살란다


이전 01화 나도 내가 그리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