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새로운 시작
게으름뱅이의 고백
White 흰색은 무언가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빈 캔버스입니다. 새로운 시작, 마음이 가진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색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는 시간관리였습니다. 오롯이 펼쳐진 자유시간 속에 게으름뱅이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원하는 프리랜서가 되었지만 시간을 허비하며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제 자신이 미워졌고요.
가장 힘들었던 점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시간을 쉽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미뤄뒀던 콘텐츠를 즐거운 마음으로 소비해도 좋으련만, TV를 보는 저는 늘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늘 ‘나는 무능해’라는 작은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러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시작하며, 저는 이 ‘게으름’ 단순한 ‘시간관리의 무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저는 사실 늘 도피처가 필요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잠깐 미뤄 둘 TV가 도피처였고, 오늘의 일정에만 집중하면 그만인 여행을 인공호흡기로 여겼습니다. 작은 물건들을 사 모으며 순간의 짜릿함에 취하고, 미뤄둔 많은 일들을 머릿속으로만 굴리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예술가들의 루틴을 정리해 놓은 표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TV 속에 빠지지 않고 하루를 꾸려갔을까? 스스로에게 데드라인을 줬을까, 누군가 푸시했을까? 하루 종일 작업했을까, 밤을 새 작업하다 지쳐 잠들었을까?
제 예상과 달리 많은 예술가들이 오전 작업에 몰두했고, 그 집중을 위해 온 하루의 루틴을 조정했습니다. 그들의 루틴을 보며 번뜩이는 창조성이나 아이디어에 결과물을 의지하기보다, 하루의 ‘삶을 정돈’하고, ‘나다운 일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루틴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삶을 다시 되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시간관리 요령이나 게으름 탈피를 위한 좋은 습관 만들기를 떠나, 삶을 정돈하고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꼈습니다.
예술가들의 루틴 서식을 참고하여 나만의 ‘데일리 루틴’ 서식을 만들고, 마커펜으로 나의 일주일을 나누어 봤습니다. 수면 시간을 정해보고, 아침에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 보는 작업은 낯설지만 엄숙한, 내 하루에 대한 객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영감을 받는 시간’과 ‘아웃풋을 내야 하는 시간’을 구분했습니다. ‘휴식’이라 적었지만 누워있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모호한 개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진짜로 쉬었다고 느끼는가?’, 나를 다시 재충전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들이 나에게 왔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아침에 걷기를 하고 싶고, 일주일에 한 번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매주 하는 활동에 수업 듣는 일이 포함되었으면 좋겠고, 자기 전에 독서와 요가를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시간을 정해 콘텐츠를 만들고, 또 소비하고 싶습니다.
한 주 한 주 거듭할수록 나의 일상이 더욱 명료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매일 아침으로 욕심내던 걷기의 횟수가 나에게 맞게 조정되고, 매주 나를 위해 수업을 듣고, 영감을 얻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에 응원을 받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더 용기 내어 나다운 무언가로 일주일을 채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하루는 또 어떻게 채워졌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나만의 일상과 휴식의 정의를 이야기해보고, 함께 모여 다른 이들의 휴식의 방식을 들어보고, 배워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으로 일주일을 꽉 채우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 삶에서 원하는 종류와 적당한 양의 휴식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 이상적인 계획표대로 하루를 완성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내가 원하는 활동으로 하루를 마감했다는 만족.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나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줬다는 믿음과 기쁨. 컬러루틴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다운 일상을 바라보고,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