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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Sep 04. 2020

혼수를 마련하는 기분은 어떨까?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여남 생활

결혼을 하고, 신혼살림을 장만할 때가 되면 ‘돈이 돈 같지 않게’ 느껴진다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의 느낌을 요즘 조금 알 것 같다. 이사를 하고 났더니 필요한 것들이 많다. 새집 년세도 큰돈이었고, 그전에 살던 집에서는 따로 필요하지 않던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도 필요했다. 선풍기와 무선청소기는 다행히 선물을 받았고, 정수기와 건조기 렌탈 서비스도 신청했다. 이사하던 날 저녁에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친구들이 왔을 때는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제주에 어머니 댁이 있는 친구에게 이불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여럿이 몇 밤을 지냈다. 그때도 당장 필요한 세제며 화장지, 생수를 친구들이 가져와 주었고, 인원이 많으니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어수선함을 감수하며 지낸 터라 차분히 살림을 톺아볼 새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혼자 며칠을 지내다 형용이가 오자마자 또 친구들이 온다고 하니 괜히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게 느껴졌다. 큰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 요 커버도 사고, 베개도 사고, 또 보다 보니 이것저것 살 것이 많았다. 침구류와 가전제품(선풍기, 무선청소기)등을 보는 게 중요했는데, 들어가서 구경하다 보니 식료품들부터 눈을 사로잡아서 좀처럼 앞으로 나가 지지가 않았다. 당장 내일 오는 친구들에게 저녁 대접할 거리도 사고, 동네 마트에서는 찾기 힘든 식재료들도 조금 사 두었다.

막상 이불 코너에 가서는 가격이 비싸서 머뭇거리게 됐다. 요 커버는 없어서 대신 이불 커버를 사고, 베개도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한참 고민했다. 베개 하나 사는데도 이렇게 고민하게 되는 게 기분이 조금 묘했다. 앞에 가득 진열돼 있는 이불들 중에 가장 싼 것, 너무 취향에 안 맞는 것 아니고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중 저렴한 것,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다음에 사자고 하는 일이 반복됐다. 파트너와 함께 사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일인데, 설레는 기분보다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썼다는 약간의 스트레스, 왜 이렇게 살 게 많지 하는 생각, 그리고 이렇게 필요하게 많다면 결혼을 하는 것과 뭐가 크게 다른지 하는 약간의 헷갈림, 큰 차이가 없다면 결혼을 해서 부모님과 친지, 친구들의 축하와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살림을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부모님이 걱정하는 상황에서 제주에 내려와 있다 보니 기회만 생기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결혼을 한 상태였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까지... 서울에 있을 때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봤었다.

결혼이라는 걸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던 카페가 백화점 가전코너와 같은 층에 있어서 제주도에 오기 전에 들렀을 때, 신혼부부들은 혹은 결혼을 앞둔 신부(내가 여자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가전을 보러 부모님과 매장을 둘러보는 상상을 하면 대게 여자가 떠오르는 것 같다.)와 부모들은 백화점에서 가전 쇼핑을 하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가진 예산이나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결혼을 한다고 하면 소위 ‘필수 가전’이라는 것을 마련해야 하고, 백화점에 가거나 브랜드 매장에 가거나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할 것이다. 그런데 백화점에 화려하게 전시된 가전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데서 가전을 고르듯 쇼핑을 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엄마는, 아빠는 어떤 상상들을 해봤을까. 엄마야말로 딸에게 제대로 된 살림을 꾸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 모르고, 아빠는 결혼식장에 딸 손을 잡고 들어가는 상상을 해 봤을지 모른다. 예쁘게 꾸며진 딸 집에 놀러 가고, 곧 아이가 태어나 귀여운 아이를 보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 아빠의 로망을 이뤄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 내 로망도 때때로 삐걱거리고, 내 로망이 이게 맞나 싶은데 엄마, 아빠의 로망까지 어떻게 걱정할 수 있을까. 기회가 되면 함께 여행 가는 로망은 한번 이뤄드리고 싶다. 내 로망이기도 하고.

‘결혼’이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할까. 내가 내 돈을 쓰며 살림을 사는데도 왜 내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끼어들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까. 돈이 많아 필요한 것들을 턱턱 살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안 할 텐데, 일정한 수입도 없이 돈만 쓰고, 둘이 사는데 필요한 것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덜컥 겁이 나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직업을 갖고 일정한 수입이 있다면 오히려 ‘결혼’이라는 선택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나조차도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너무 많고, 어디까지가 내 욕망이고 아닌지도 헷갈리는 상황에서 너무 어려운 주제지만 ‘결혼’이라는 게 무엇인지, 결혼이 아니고 같이 사는 삶은 어떤지 애써 적어놔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가 버릴 테고, 무언가에 떠밀리듯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라 뭘 하는데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린다. 그 시간을 기록해 놓지 않는다면 너무 아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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