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기 Mar 27. 2021

느리게 맞이하는 봄

제주 살이

벚꽃이 피는 계절이다. 내 느낌은 그저 벌써 벚꽃이 피나 싶은 정도다. 아직 3월 말이니까 이르기는 한 것 같다. 제주도니까 그렇기도 할 것이고, 아무튼 때 이른 어떤 것을 만난 느낌이랄까, 아직 벚꽃을 만난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아직 봄이 안 온 것 같은데, 벌써 봄이라면 내가 봄맞이 준비도 안 하고 너무 게으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봄이 온 건 사실이다. 아직 아침, 저녁으로 춥고, 낮에도 따뜻한 햇살에 속아 나가 보면 찬바람이 쌩쌩 불어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우리 집 마당에 핀 민들레꽃 도라지꽃만 봐도 봄이 오기는 했다. 그저 내 기분만 아직 봄이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벚나무 가지에 꽃이 피긴 했어도 아직 빈약해 보이고, 벚꽃 놀이를 갈 때도 아직 아닌 것 같다. 눈 내린 한라산에 가 보지 못하고 겨울을 지나서 아직 겨울이 아쉬워서 그런가..

봄은 언제나 아쉽고, 벚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봄을 보내면 더 아쉬운 느낌이 들지만 올해는 벚꽃이 핀 것을 봐도 ‘우와’하는 감흥이 일지 않고, 벚꽃을 보러 가야 한다고 조바심도 나지 않는다. 대신 요즘엔 원석 주얼리 사진들을 한참이고 들여다봤다. 엄마가 이번 생일에 금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나에게 돈을 줄 테니 대신 사 달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엄마가 원한대로 순금 목걸이를 찾다 보니 맘에 드는 것도 별로 없고, 보는 재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실제로 살 마음을 먹고 비싼 물건들, 소위 ‘귀금속’을 고르자니 기분이 좋았다. 보다 보니 눈이 점점 높아져서 명품 주얼리들까지 보게 되었고, 엄마에게 몇백만 원짜리 목걸이를 사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엄마가 엄마 돈으로 하는 순금 목걸이 말고, 좀 더 가볍게 늘 하고 있을 수 있는 목걸이를 같이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꽤 찾아봐도 썩 맘에 드는 게 찾아지지 않았다. 예의 ‘명품’ 목걸이들을 봤으니 내가 살 수 있는 가격대에서 눈에 들어오는 걸 찾기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번엔 마음을 접고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예전에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찜해둔 주얼리 브랜드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파트너의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요리조리 검색해서 찾았다. 내 계정을 비활성화 해 놓고, 어플도 지워놓은 터라 별 수가 없었다. 계정이 살아 있었다면 금방 찾았겠지만.. 이틀인가를 고민해서 엄마 목걸이를 하나 주문하고도 어젯밤엔 괜히 그 디자이너의 계정에 들어가서 주얼리 사진들을 한참 보았다. 목걸이 하나를 고르려고 홈페이지를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았고, 그것도 모자라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작고 반짝이는 물건들을 한참이고 구경한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번 봄엔 벚꽃보다 주얼리 구경이 더 좋아진 모양이라고.

반짝이는 보석이 예쁜 것은 당연하지만 벚꽃보다 더 보고 싶다니..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요즘에는 ‘보석’이라는 말은 많이 쓰지 않고, ‘천연 원석’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연 원석’ 이 ‘보석’이 된 것은 광물의 희귀성은 물론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반짝이는 보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물론 갖고 싶다), 가지지 못해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예뻐서 몇 번이고 보고 싶다니..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그 주얼리 디자이너가 선택한 원석들의 빛깔이 특히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이 잘 살아나게끔 디자인을 하고, 다른 소품과도 잘 어울리게 촬영을 잘해서 그럴 수도 있다. 보석이나 주얼리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뿐이었다면 다른 수많은 브랜드나 인터넷 쇼핑몰을 보는 것도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게는 이 중 가장 예쁘고 가성비가 좋은 제품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 머리 아프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봄이 왔으니 벚꽃도 보러 가고, 고사리도 끊으러 갈 것이다. 마당에서 달래도 캐고 쑥도 캐야지. 집 공사도 잘하고, 공사 기간 동안도 잘 지낼 것이다. 오늘은 당근 마켓에서 책을 무료 나눔 했더니 수선화를 뿌리 채 세 개나 받았다. 어제 오일장에서 사 온 고추 모종, 로메인 모종, 방울토마토 모종 심을 때 한쪽에 꽃도 심어야지. 꽃이 피는 걸 남들보다 조금 늦게 깨달았어도 봄은 아직 남았다. 벚꽃도 조금 지나면 더 풍성해질 것이고, 고사리 장마가 올 때쯤이면 보리도 산책을 다닐 수 있겠지. 오늘은 봄비에 흐리고 축축한 날씨지만 산책을 못 가도 집에서 꾹 참고 잘 지내는 보리를 보면 조금 따뜻한 기분이 든다. 봄을 맞이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집 없는 설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