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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28. 2021

쿨방석, 까망이, 바다 산책

제주에서 보리 키우는 이야기


1. 쿨방석

보리가 요새 바닥에서 잔다. 모기장 안에서 자다가 보리가 이불에 쉬야를 한 적이 있어서 그다음부터는 모기장 밖에서 자고 있어서다. 모기장이 보리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구조라서 어쩔 수 없다. 집 안에 보리가 쉬는 자리는 여러 곳이지만 우리가 자는 방에는 따로 없어서 평소에는 잘 때 방석을 깔아주는데, 풀숲을 지나 바닷가에 다녀왔더니 자잘한 진드기가 잔뜩 붙었길래 빨려고 내놔서 어제 그제는 바닥에서 잤다. 그랬더니 안쓰럽기도 하고, 여름이라 더우니 쿨방석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인터넷 쇼핑을 하려는데 괜찮아 보이는 게 있어도 선뜻 주문을 할 수가 없다.

더위를 더 많이 타는 건 보리가 아니라 아이비였다. 작년에 내가 더위 타고 있는 아이를 모르고 차에 태웠다가 큰일이 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원래 더위에 약한지 그다음부터 아이비는 날이 뜨거우면 숨을 몰아쉬고, 자꾸만 땅을 파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바닥에 누우려고 했다.

작년에 가장 더울 때 우리가 이사를 했다. 그즈음 아이비는 줄이 자주 풀려서 우리 집 마당에 와 있곤 했다. 그늘을 골라가며 묶어놔 줬었다. 그때 아이비랑 보리 둘 다 데려왔다면 어땠을까. 아이비까지 데려오면 무무가 너무 방치될까 봐 그럴 수 없었고, 그렇다고 세 마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비에게 관심이 있다는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늦게 본 것이 계속 후회가 된다. 그때 아저씨를 설득했더라면 어땠을까.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모두 너무 늦은 생각일 뿐이다.

쿨방석을 주문하지 못했다. 지금은 아이비가 잘 있는지,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확인하러 갈 용기도 내지 못한다. 다른 건 잘도 사면서 왜 쿨방석에서 손이 움직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더 더워진다.      



2. 까망이

우리 집이 있는 골목 제일 안쪽 집에 검은 강아지가 산다. 아주 어린 강아지가 어느 날부터 묶여 있었다. 원래 보리가 종종 놀러 가서 같이 놀던 아이가 살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는 없어졌고, 이제 그 사람이 개를 안 키우나 보다 하고 속으로 다행스러워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어린 강아지가 나타난 것이다. 겁이 너무 많아서 줄이 풀린 보리가 그쪽으로 가까이 가기만 해도 깨갱거리고 집 끝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올 때면 좋아서 오줌을 흘리던 그 전의 아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고, 그만큼 어렸으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보리가 몇 번 가출을 했던 1월과 2월 무렵에 왔던 것 같다. 그때 아기였으니까 지금 8개월이나 9개월 정도 됐으려나? 늘 묶여 있기만 했는데 요새 자주 풀려 있었다. 그러더니 우리 집에 놀러 오기 시작했다. 보리도 가끔 마당에 묶어 놓으니까 그때 만나면 신나게 놀았다. 보리도 혼자 있으면 심심한데 친구가 생겨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줄이 풀려 있으니 행동반경이 점점 넓어지다 사고가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줄에 종일 묶여 있는 것과 풀려서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중성화도 안 되어 있어서 더 걱정인데, 보리랑 놀다가도 자꾸 마운팅을 하는 것도 맘에 걸렸다. 어느 날은 배가 고픈 것 같아서 간식이랑 물을 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람에게  겁을 내더니 어느새 나한테는 가까이 다가와 팔을 핥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낮에 강아지가 왔었는데, 강아지를 찾으러 온 주인아저씨가 짝꿍에게 그 강아지를 데려가도 된다고 했단다. 우리는 개가 이미 있다고 하고 들어왔는데, 한참 후에 나가 보니 보리 묶어두는 줄에 까망이가 묶여 있었다고 한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 개를 남의 집 마당에 멋대로 묶어 두고 간 것일까. 제대로 키우지도 않을 거면서 새끼 강아지는 왜 데려와서 키운 것일까. 그리고 다 클 때까지 그냥 뒀다가 좀 크니까 풀어두는 심보는 무엇일까. 차라리 애기 때 주변에 물어 키울 사람을 찾는다면 훨씬 많은 가능성이 있을 텐데. 얼마 전 다른 이웃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 아저씨는 원래 암컷만 키웠는데, 어릴 때 묶어 둬서 자기 집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풀어 준다고 한다. 그러고 발정기에 나가서 임신이 되어 돌아오면 새끼들과 함께 팔았다고 한다. 그 아저씨가 키우던 개에게 밥을 챙겨주다 병이 들어 죽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고 하고, 우리가 본 이전 개와 지금 개 말고도 여러 마리가 그 집에 다녀갔다고 한다.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 자기가 잔인한 줄 모르고 잔인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의 병이 있는 줄 모르고, 마음의 병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의 병을 드러내고 치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의 병을 마음의 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강아지가 자기를 향해 꼬리를 치는 모습이 좋아서, 어떤 보살핌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이다.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못하고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사람들도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의 병을 가지게 된 것이 꼭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고, 법제도가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글이 길어졌지만 그래서 까망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입양처를 찾아줘야 하는 걸까?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일까?      

보리와 친구가 된 첫 날


3. 바다 산책

기분 좋은 일도 있다. 조금 피곤했더라도 보리랑 저녁 산책을 충분하게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은데, 오늘은 제주에 와 있는 친구와 같이 바다 산책을 나섰다. 서울 생활에 지친 친구에게 우리의 비밀장소(?)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보리를 좋아하는 친구라서 함께 보리가 좋아하는 바다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원래는 얼마 전 산책하다 발견한 작은 해변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씩을 하고 오려고 했는데, 물이 너무 많이 빠져서 작은 해변이 긴 돌밭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좀 더 멀리에 숨겨진 곳으로 갔다. 숨겨진 곳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바닷가인데, 오늘은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보리도 잠시 줄 없이 뛰어놀게 해 줬다. 친구가 없어서 그랬는지, 우리가 모두 앉아 있어서 그랬는지 조금 뛰어놀던 보리도 어느새 우리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평온한 시간이었다. 골치 아픈 생각들은 어느새 바람결에 날아가 버린 것처럼 바닷가에 앉아 있는 우리와 그 시간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너울성 파도가 친다더니 파도가 세긴 했지만 물이 많이 빠져서 바다가 멀리 있었다. 위험하진 않았다. 그치만 물놀이하기에도 물이 너무 멀고 막상 물을 만나면 위험할 것 같아 바다를 보기만 했다. 그래도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보리의 강아지 친구 대신 나와 짝꿍이 대신 뛰어주었다. 보리는 같이 뛰는 걸 좋아한다. 뛰는 걸 보면 무척 민첩하고 멋있다. 오늘 낮에 봤던 김훈 작가의 소설이 떠올랐다. 보리가 해안가에 밀려온 해초들과 돌 틈의 무언가를 열심히 냄새 맡았다. 검은 모래를 밟고, 돌과 돌 위를 뛰어다녔다. 몸으로 바닷바람을 맞고, 코로 먼바다와 가까운 모래 냄새를 맡았다. 보리가 사는 세상을 새삼 생각해 보았다. 보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사실 나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새삼 김훈 작가가 개를 관찰한 방식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소설 주인공인 개 이름이 ‘보리’이다. 바닷가에 사는 그 보리를 읽으면서 나는 우리 보리와 닮기도 하고, 복구와 닮기도 하고, 아이비와 닮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짜구, 먹구, 흰둥이, 누렁이 그리고 내가 본 개들과 보지 못한 수많은 개들을 닮은 개를 떠올렸다. 어두워지고 있는 길을 운전해서 돌아왔다. 제주 도로는 밤에 많이 어두워서 혹시라도 어디서 누가 갑자기 뛰어나오는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하고 앞을 본다. 보리에게도 밤에 산책할 때는 뭔가 반짝이는 걸 달아줘야 할 것 같다.  

차를 타면 늘 좋은 곳에 간다고 생각하는 보리
오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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