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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집

베를린이 내게 준 긍정적인 영향들

by borderless

삶을 바꾸진 못해도 값진 것들


문장 첫 소절부터 모순되는 얘기로 들리겠지만 2주간 베를린에 머무르면서 무언가를 크게 얻은 건 없다. 만약에 그곳에서 1년간 살았다면 분명 생활 패턴이나 어떤 삶의 기준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2주라는 시간은 그간 지내온 내 삶의 방향성을 바꿔주기엔 짧은 시간이니까. 하지만 몇 가지 나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내 몸에 잘 체화시키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하며 몇 자 정리해본다.




긍정적 피드백 5가지


1. 언어의 배움

베를린에는 정말 다양한 음식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그만큼 인종도 다양했고 대체적으로 유럽권은 어디를 가도 그렇겠지만 영어를 쓰는 분들이 있었다. 물론 예상했던 것보다 독어를 쓰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솔직히 말하면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진 않았다. 그래도 레스토랑과 상점에서 일반적으로는 영어를 쓰는 분들이 많아서 간단한 영어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고 나의 영어실력의 부족함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줘서 앞으로 배울 일이 더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여러모로 자극이 많이 됐다. 언어를 잘한다는 건 정말 부럽고 배우고 싶은 능력 중에 하나다.



매장에서 메뉴 볼 때

음식점에서 메뉴를 보고 있으면 점원이 오셔서 더 볼 거냐 혹은 주문을 할 거냐라고 물어보는데, 'can I get one' 또는 'can I see more menus' 보다 'can I keep one?'이라는 문장이 훨씬 자연스러운 문장이었다. 어떻게 말을 했어도 다 이해하셨겠지만 저 문장 하나 알고 되게 많이 배운 것 같았다.


빵을 데워달라고 할 때

또 다른 문장은 'warm it up'인데 이것도 굉장히 쉬운 단어인데 일상 언어로는 입에 달고 있지 않았던지라 뭔가 새로웠다. 'could you please bake it?'보다는 빵을 살짝 데워달라고 할 때 저렇게 'warm up'이라는 문장을 쓰는 게 훨씬 부드럽고 캐주얼했다.


옷에 대한 명칭

옷은 clothes와 clothing이 있는데, clothing은 옷의 분류 또는 구분을 위해 쓰이는 큰 항목 같은 개념이고 clothes는 옷의 복수를 말하는 단어로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매장에서 옷을 볼 때, clothes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쓸 거라고 예상했는데, 매장에 가니 그냥 'piece', 'pieces'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세벌이면 그냥 3 pieces다. 아주 편하다. 다음에 저렇게 써먹어야지.



2. 천천히 느리게 주문하기


베를린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먹는 카페모카와 애플 타르트

내 스스로 정말 많이 느꼈지만 난 조금 급했다. 나름 그래도 여유 있게 살아가고 천천히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를린에 오니 생각과 행동이 조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어디서 그런 걸 더 많이 느꼈냐면 음식점이나 어떤 매장을 가든 독일인들은 점원과 눈을 마주쳐서 주문을 빨리 하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기다리고 메뉴도 슬금슬금 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매장 직원이 다가와 주문을 하겠냐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점원이 테이블에 오지 않아서 내가 직접 가야 되는 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하며 '뭐지 뭐지 이건 뭐지 모드'로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 천천히 메뉴를 보고 정했을 때쯤 자연스럽게 음식을 주문하고 왠지 모르겠는 나름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3. 시크하지만 따뜻한 미소 탑재


독일인들은 왠지 모르게 차갑고 냉정하다 그리고 칼 같다는 나름의 편견이 있었다. 벽 하나는 아주 두껍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마음을 내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막상 베를린에 있어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친절하면서도 따뜻했고 역시나 돈은 칼 같이 계산해줬고 그런 면에 있어서는(?) 더 더욱이 정직했다. 일전에 바르셀로나에 친구와 함께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결제를 했더니 원래 내야 될 가격보다 조금 더 추가하여 마음대로 결제해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돈 계산 방식이 영 미덥지 않았다. 특히나 산츠역에서는 친구의 돈과 지갑이 모두 도난을 당한 경험도 있고 그 이후로 '음... 유럽은 아주 조심해야겠어'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보통 2~3유로 이내로 하던 커피들

하지만 막상 카페에 가보니 매장 사장님이 친절하게 다가와서 영어로 메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고 특별한 표정은 없으나 무덤덤한 모습으로 커피를 내린 뒤, 시크하게 음료를 가져다주는 그런 차분한 매력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친절하고 언제나 미소가 있었고 급하지 않았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이랄까. 더도 덜도 없는 말끔함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타지인에게 차가울 거라 예상했지만 가는 어느 매장마다 직원들은 대체적으로 친절하고 미소로 화답해줬다. 덕분에 좋은 인상을 남기고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웃음으로 화답할 수 있었다.



4. 역사를 배우고 천천히 읽는 국민


온몸이 녹초가 된 여행 첫날,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간 곳은 베를린 장벽과 테러의 토포 그라피 topography of Terror 였다. 토포 그라피에 대한 정보를 더 찾아보면 1933년 1945년 사이 나치의 학대와 테러의 중심이었던 비밀경찰국 Secret state police office과 나치 보안 사무국이 위치했던 곳이다. 토포그라피는 그로피우스 바우 현대미술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고 건물 바로 맞은편에는 베를린 장벽이 자리 잡고 있다.


나치 시절의 공포 정치를 낱낱이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과 학생들이 방문하여 공부하고 정말 꼼꼼히 역사를 살펴보는 모습에 조금은 감동했다. 과연 나는 평소에 그들처럼 이렇게 역사를 꼼꼼히 보는지 그리고 내가 사는 한국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새삼 작게나마 깨닫는 것도 있었다. 그러기엔 나는 꽤 무지한 면이 적지않다고 생각하지만.



5. 소박한 패션


내가 서울에서 지내면서 한국 사람들이 입는 패션감각은 화려하다고 생각할 때가 꽤 많다. 옷을 잘 입으시는 분들이 많고 특히 여성분들의 경우 화장법이며 패션 감각 그리고 스스로 관리도 잘하여 일반적 관념과 보수적인 아름다움 기준으로 보면 예쁜 분들이 많다 여긴다. 무엇보다 브라운관에 나오는 아이돌들의 화려한 머리 색깔과 코스튬 같으나 감각적인 의상들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옷 감각이 좋구나 하는 생각을 매번 한다.


하지만 그와 달리, 막상 베를린에 와보니 독일인들이 입는 평상복들은 굉장히 소박했고 여성분들도 특별히 진한 메이크업보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을 많이 봤다. 그래서 오히려 나 또한 몸에 귀걸이 하나를 더 하거나 목걸이를 더 걸치는 게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괜히 군더더기 만들어내는 느낌마저 들었다. 평소에도 옷은 굉장히 소박하게 입는 편인데 독일인들의 평범한 듯 실용적인 착장은 취향저격이었다. 글쎄 옷이야 잘 입으면 좋지만 옷 보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던가.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라면 'ethos'가 중요하다고 한다. 이 말은 일전에 우연히 본 영상에서 알게 되었고, 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지만 인간을 설득할 때 중요한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로고스 logos, 둘째는 파토스 pathos, 셋째는 앞서 말한 에토스 ethos이다. 로고스는 이성, 똑똑함을 말하고 에토스는 인간에게 감정을 호소하고 그 감성을 건드리는 역할, 마지막인 에토스는 '한 인간이 살아온 그 사람의 인격과 살아온 삶의 과정'을 말한다.


아무리 언변이 좋고 화려하게 꾸며도 에토스가 부족하다면 무슨 소용인가. 나 스스로에게 언제나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베를린에 대한 얘기


2주는 어찌 보면 짧을 수도 있고 꽤 길 수도 있는 시간인데 앞으로 천천히 경험했던 것들을 풀어보려 한다. 다만 시간이 여유로운 한해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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