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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Blues Jan 14. 2019

5. 무서운 아빠 vs. 우스운 아빠

풀타임 아빠 육아기 <아내가 이사갔다> 5화

아빠로서, 우리는 확실히 낀 세대이다. 현시대가 요구하는 아빠의 역할을 어린 우리는 겪어본 적이 없다.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고 그리 많은 대화를 해본 적도 없다.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특히 식사 시간에 잘못 걸렸다간 호된 꾸중을 들었다. 사실 기억해보면 나를 향한 꾸중보다 어머니를 향한 메시지가 많았다. 당신은 애를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렇듯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는 1차적 책임은 오롯이 어머니에게 있었다.  


그렇게 자랐는데 커서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해야하니 어렵다. 오해마시라. 억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맞다고 생각하기에 억울할 것은 없다. 다만 어려울 뿐.


사실 별로 어렵다고 느끼지도 않았었다. 육아휴직 전까진. 내 스스로 북유럽식 아빠 노릇을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칼퇴, 반차 등을 수시로 냈고 주말에는 엄마없이 아이와 오롯이 둘이 보내는 날도 꽤 많았기 때문에.


그런데 육아휴직 후 아내 없는 집에서 매일 24시간을 아이와 단둘이 살아보니 그때는 그냥 흉내만 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행동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나의 아버지 세대의 마인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이는 그 점을 정말 귀신같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 ‘아빤 무셔워’였다. 아내와 같이 세 식구가 살 때에는 아이가 나를 무서워한다는 게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여겨졌다. 부모가 둘 다 만만하면 어쩌겠나. 나라도 무서워하는 게 아이가 바르게 크는 데에 더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나랑 잘 있다가도 엄마 등장하면 화학반응처럼(이온화경향스럽게) 가버리는 아이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아이를 위한 아빠의 담대한 희생이라 자위하며 악역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이사가고 아빠와 딸아이 둘만 24시간 붙어 사는 시기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아이에게 아빠가 무서운 존재, 두렵고 싫은 존재가 되면 안되는 것이었다. 엄마가 없는 것도 서러운데 무서운 아빠와 둘만 있어야하는 것은 아이에게 정말 못할 짓이라 생각되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참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이러다 애 망치는 거 아닌가하는 의심 따윈 곱게 접어두고 일단 만만하고 편한 존재가 되어보기로 했다. 서천석 등 육아전문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아빠들은 일단 아이와 정서적 거리를..'류의 조언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아내 이사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아빤 무셔워’를 반복했다. 특히 내 딴에는 최대한 친절하고 나이스하게 아이 비위를 맞춰주고 있는 데 '아빤 무셔워'가 발사되면 정신이 아득해지며 진짜 무서운게 뭔지를 한번 보여주는게 맞나 안맞나를 고민하다가 그간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아까워서 곧바로 이를 깨물며 빙구 미소를 머금어줬다.


약 한 달이 지날 무렵부터 변화가 느껴졌다. 아이의 병 때문에 서로 돈독해 진 것도 있겠지만 그간 몸에 사리 생성해가며 노력한 ‘안무서운 존재되기’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 무셔워의 횟수가 눈에 띄게 줄면서 아이가 나를 편하고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 행동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대고 치대고 만지고 붙잡고 매달리고 때리는(!) 일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엄마에게 하던 행동 그대로였다. 어느날 아침을 먹다 ‘아빤 너무 우스워’ 하는데 이제 됐다 싶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일단 아이의 마음에 들고 나니 예전보다 내말을 더 잘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무서운 훈육모드를 사용할 일이 한층 줄어들었다. 집에서 아이들이 혼나는 대표 케이스인 ‘자기 전 이닦고 씻기’를 예로 들자면, 예전에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 내가 화를 내야 겨우 화장실에 들어갔다면, 요즘에는.. 그냥 예전보다 덜 미룬다. 아이와 이불바닥에서 웃으며 뒹굴고 놀다가 “이제는 씻고 와야겠다. 아빠도 씻고 올게”하면 “응~”하고 그냥 화장실로 가는 식이다. 물론 매일이 이렇게 수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실히 무서운 아빠였을 때 보다 더 수월하다.


얼마 전 고향 친구놈과 육아 이야기를 나누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친구도 아내가 너무 착해빠져서 본인이 애들을 혼내는 악역을 하고 있고 그래서 애들이 자기를 안좋아한다고 했다. 악역은 아이 세계관 속 절대자인 엄마들이 좀 해줘야 아빠들도 애들한테 사랑을 좀 받을 것이니냐는 말에 나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한편으로 악역은 경상도 출신 아빠들의 종특인가 싶기도 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집에 오면 ‘밥은?아는?자자’만 말하시는 아버지들 밑에서 자랐으니까.


간신히 우스운 아빠가 되었지만 무서운 아빠를 아예 놓을 수는 없다. 아이의 안전과 건강을 놓을 수 없고 매너와 배려를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하고 싶은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항상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무서울 때도 있지만 우스울 때가 훨씬 많은 아빠'가 되고 싶은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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