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빌림 Oct 27. 2024

봄을 조심하세요

그렇게 예고도 없이

  문득 생각하면 나는 계절을 잘 타는 사람이다. 봄과 여름에는 명랑한 날씨처럼 무엇이든 도전한다. 반대로 가을과 겨울에는 차분하고 진중하게, 추운 날씨를 핑계로 움직임이 둔해지는 시기이다. 한 몸에 여러 페르소나가 존재하듯 계절마다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달라진다. 날이 점차 풀리면서 자연스레 이번 봄에는 두 가지를 다짐했다. 첫 번째는 연애하지 않고 취업 준비와 상경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 두 번째는 자전거를 배워서 택시 말고 공용자전거를 빌려 타서 교통비를 아끼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봄이 지나기도 전에 두 다짐 모두 실패해 버렸다. 


 먼저 실패한 건 두 번째 다짐이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무게 중심이 잘못되었는지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다. 바퀴가 움직이기는커녕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돌아가고 나의 땀만 뚝뚝 발자국을 남긴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반납 시간이 다 되었다. 반나절을 공원에서 보낸 거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페달 질을 했는데’ 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전거를 서둘러 반납한다. 남은 건 무릎과 정강이에 든 푸른 멍 뿐이다. 그런 다리로 벚꽃나무가 빼곡한 길을 걷는다. 밤길을 밝히는 건 다름 아닌 가로등과 달빛에 반사되는 벚꽃들이다. 지금은 봄인데 마치 겨울처럼 눈이 흩날린다. 


‘벌써 꽃이 이렇게 떨어지다니’


 살랑 부는 꽃바람에 땀이 식으면서 서운한 마음도 차분해졌다. 그 짧은 순간에 꽃 알레르기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감사한 마음도 가졌다. 그렇게 한참 오래 보았을까, 쌔앵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벚꽃에 매료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둘씩 짝지어 벚꽃을 보는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쌩쌩 달리는 차 소리를 다 덮었다. 연애하지 않겠다는 나의 첫 번째 다짐도 웃음소리에 살짝 덮인다.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아지트를 보여주겠다며 친구를 30분이나 걷게 했다. 아지트는 바다를 아주 가까이 볼 수 있는 공원으로 최근에 지어져서 발길이 거의 없는 곳이다. 우울한 생각으로 밤을 꼬박 새울 때, 자주 찾아 위로를 받은 곳이다. 그런 소중한 나의 장소에 “왜 이렇게 머냐, 버스를 진작에 탈 걸 그랬다”라며 친구는 나의 귀에 피가 나도록 짜증을 쏟아냈다. 하지만 나도 ‘버스를 탈 걸’ 후회했기 때문에 친구를 어르고 달래며 아지트에 도착했다. 한참을 걸어 바다를 보여주니 오길 잘했다고, 투정 부리며 주름졌던 미간은 그새 검은 파도로 다 지워진 모양이다. 항상 우리가 만나면 하는 이야기는 정해져 있다. 예술 이야기, 최근에 본 독립영화 이야기, 그냥 사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웃긴 이야기. 진중하다가도 농담으로 


웃고 울고 그렇게 한 시간이 밤바다 앞에서 순식간에 지나갔다. 벌써 친구를 집에 돌려보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친구는 텁텁하고 짭짤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런 멋진 장소를 보여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날씨는 정말 조심해야 하는데 라고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물었다. ‘뭐를?’


“봄, 바닷바람, 파도 소리. 그리고 나란히 걷는 산책. 지금 딱 사랑에 안 빠질 수 없는 이 모든 것 말이야” 


예고도 없이 다짐을 속으로 삼키게 만드는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