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어릴 적, 추운 겨울밤이면 군불 지핀 초가집 안방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곤 했다. 눈 쌓인 바깥은 습자지가 먹물 먹듯 소리 먹어 먹먹한데 그 장면은 화선지의 먹그림처럼 고즈넉하고 잠잠하다.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에 매달린 30촉 알전구는 동굴 속의 횃불처럼 발그레한 불빛을 흩뿌리며 어둠을 쓸었다. 커다란 솜이불로 다리만 덮고 앉으면 엉덩이는 뜨겁고 등은 시렸던 내 어린 시절 시골집의 겨울밤.
TV도 없던 긴긴 겨울밤 꼬박 방안에 틀어박혀 있어지만 우린 심심풀이 놀이하며 재밌게 보냈었다. '보물찾기' 놀이는 두 형과 여동생과 함께하던 놀이였다. 보물이라고 해야 기껏 가위, 재떨이, 컵, 필통, 모자 등이었다.
술래가 엎드려서 열을 세는 동안 나머지는 미리 보물이라고 정한 몇몇 물건들을 방안의 어딘가에 숨겨놓으면 술래는 그 보물들을 하나씩 찾는 놀이다. 학교에서 봄과 가을에 야산으로 소풍 가서 하던 보물찾기와 비슷하다.
보물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물건들이지만 보물이라고 정한 물건들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진짜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뻐했던 우리 남매는 이제 그때의 우리보다 더 큰 아이들을 둔 부모가 되어 있다. 유치하지만 겨울밤 방 안에서 남매가 함께 노는 놀이여서 좋았다.
집은 보물이 가득한 개인 박물관이다. 내가 어떤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면 그 물건의 나에게 보물이 된다. 돼지에게 다이아몬드는 한낱 모래에 불과하지만 고구마는 소중한 보물이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물이라고 여기는 금이나 골동품은 아닐지라도 각자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이 있다.
이런 개인적 보물은 대개 집안에 있다. 국립박물관에 국보들이 전시되어 있듯 가정집에는 사보들이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늘 곁에 두었던 인형,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선물, 서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었던 소품, 마음을 주고받은 편지, 삶을 고스란히 그려낸 일기장, 입으면서 너무 행복해하던 예쁜 옷, 흥겹게 연주를 하는 작은 악기, 들으면 행복한 음악 CD, 감동하며 읽었던 소설책 등. 비록 남에게는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자신에게는 의미 있는 보물이다. 광택 잃은 놋그릇을 닦듯이 이 보물들을 쓰다듬으면 거기에 스민 사연들이 송골송골 되살아난다.
어느 집이나 방안에 책이 있고 음악 CD가 있을 것이다. 책은 여러 번 기쁨을 준다. 고를 때의 설렘과 살 때의 뿌듯함과 읽을 때의 짜릿함과 보관할 때의 든든함. 책을 자주 읽든 읽지 못하든 우리 사는 동안 책은 다정한 글벗이다. 음악은 같이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단짝 친구다. 음악에 취해보지 않은 이는 밋밋한 인간이다. 음악은 감각을 일깨우며 감격을 북돋운다. 음악 없이 사는 것은 발가락 하나가 빠진 기우뚱한 걸음걸이 삶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가 되어주었던 곡들이 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소꿉친구가 곁에 있는 양 외로움 없다.
지금은 편지를 거의 쓰지 않는다. 전자메일과 문자도 이젠 신선하지 않고 트위터, 카톡, 인스타가 대세지만 이도 또 다른 샛별이 뜨면 자리바꿈 할 것이다. 생각을 전하는 수단은 점점 디지털화되어가지만 아날로그 편지가 주는 여운은 디지털 메시지가 따라가지 못한다. 바로 쓰고 바로 보는 디지털 메시지와 달리 아날로그 편지는 오래 생각하며 쓰고,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을 때마다 설렘과 기다림을 품고 있다. 학창 시절에 주고받은 편지는 그 당시의 날 행복하게 했던 지지배배 종달새였다. 어쩌다 그 시절의 편지를 꺼내보면 나는 금방 당시의 소년으로 되돌아가 있다.
일기장은 자신이 만든 책이다. 그 안에는 시도 있고 수필도 있고 소설도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것이 바로 일기장이다. 일기장을 보면 그때의 자기를 거울에 비추는 듯하다. 거울 앞에서 제 얼굴을 제대로 보듯 일기장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본다. 일기장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조개의 나이금처럼 자신의 자라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삶의 기록이다.
사람마다 마음 두는 취향이 다 다르다. 취향 따라 노래하고 춤추며 산도 오르고 달리기도 한다. 취미생활은 생활의 활력이다. 마음 담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에게 보물인 것이다.
우리집에는 여러 장식물이 있다. 아내가 만든 알 공예품과 직접 만든 비즈 휴대폰 줄, 각종 종이장식. 소중한 분이 선물한 호피무늬의 수석. 이 뿐 아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하모니카, 각국의 나무 피리, 흙피리인 오카리나 등등. 전문가처럼 멋진 연주는 하지 못하지만 때때로 불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나의 보물들이다.
수백 년 된 도자기 하나가 수억 원을 호가한다. 골동품은 오래된 친구처럼 세월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해가는 물건이다. 보물은 시간이 더해지면 가치도 더해진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도 시간을 더할수록 가치 더하는 물건들이 있다. 최신 핸드폰보다는 처음 산 삐삐가 내겐 더 가치 있다. 어린 적의 칙칙한 흑백사진은 지금의 형형색색 사진보다 더 정이 간다.
나만의 보물이 있는 한 나는 부자다. 그 보물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한 나는 가난할 수 없다. 내 보물은 누구나 탐내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돼지 앞의 고구마다. 나는 다이아몬드는 없지만 고구마는 많다. 나는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알부자다.